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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서 Oct 28. 2021

책을 굳이 다 읽을 필요는 없지

완독보다는 독서 자체에

나는 결과 중심적인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취미에서조차도 과정을 즐기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ebs에서 방영한(ebs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다큐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다 읽으면 스티커?를 주는 사회 실험이었는데(스티커가 많을수록 상품을 받나 아무튼 혜택이 있었다), 아이들은 책을 경쟁적으로 읽어재끼기 시작했다.


보지도 않고 뭉텅이로 넘기는 아이, 유치원생이나 읽을 법 한 얇은 그림책을 고르는 아이.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책을 읽었고(아니 넘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스티커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형제가 있었는데, 두 형제는 아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은 관심도 없다는 듯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자리 잡고 책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나중에 형제의 부모님을 찾아서 교육관을 물어보는 포맷이었는데, 어린 나는 남의 집 가정교육에는 관심은 없었고.


다큐를 보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꼈을 뿐이었다.


나도 저 형제들처럼 책을 음미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나이에 맞지도 않은 그림책을  

뭉텅이로 넘기며 스티커를 받기 위해 사서 선생님에게 걸어가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그 이후로 학교 도서관에 갈 때마다 괜스레 늦게 책장을 넘기곤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지금 촬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그러나 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처럼 곧바로 다시 치열하게 책을 읽어나갔다. 누가 빨리 읽는다고 상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책을 사면 그 순간부터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과업이 부가된 것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좀 지루하다 싶으면 그냥 그 부분은 넘겨버렸다. 집중이 떨어지면 책 읽는 걸 잠깐 멈추면 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반드시 오늘 안에 읽어야 한다는 정체모를 강박관념은 손에서 책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보통 앉은자리에서 책을 표면상 다 읽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과제 제출 버튼을 누르는 듯 한 할 일을 끝냈다는 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넘긴 부분이 군데군데 있어서 인지 어떤 책에서는 그 책의 핵심 사건을 친구의 입을 통해 들을 적도 있다. 여기에 진짜 책을 읽은 게 맞냐는 친구의 불신의 눈빛을 곁들어서.


“거기서 그 소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나이 든 남자였잖아!”
‘뭐? 여자가 아니었어?’


내 스스로도 나의 이런 강박관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퇴사 기념으로 산 정세랑 작가님의 <피프티 피플>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흡입력도 좋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흥미로웠다(단편 아닌 단편 소설 모음집이라 호흡이 짧아서 집중하기도 좋았다). 그래서 짜증 났다.


‘이 사람은 뭔데 이렇게 글을 잘 써’

‘단어들은 왜 이렇게 다양하고 표현력은 왜 이렇게 좋아’

‘이 사람 국문과 나왔나?’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들이 유치한 단어 돌려막기 식의 글이라고 생각되고

‘작가는 타고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건가’라는 자괴감에 휩싸이자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흰 백지에 검은 무늬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집중력은 이미 저 먼 곳으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났는데 나는 또 습관적으로 종이를 넘겼다.


순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읽는 그 순간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완독(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를 표시하고 책은 언제라도 손이 닿을 수 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두었다.


‘취미인데 내가 읽고 싶을 때 읽어도 되지. 책 읽는 그 순간이 중요한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속 책으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애써 찜찜한 마음을 외면했다.


그 이후 어느 날은 5장 또 어떤 날은 30장을 읽어갔고


책을 산지 일주일이 된 지금도 나는 아직 <피프티 피플>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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