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서 Jun 17. 2023

퇴직금 대신 받은 보안유지 각서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나서는 가뜩이나 가지 않았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천천히 흘렀다.     


마치 감옥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 파피용 마냥 퇴사 날까지 하루하루 카운트 다운을 하며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을 내 발로 가는 일이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죄가 없기에 최소 수업 시작 30분 전에는 학원에 와서 청소를 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학생들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를 했고 즐겁게 수업을 했다. 우스개 소리로 친구들에게는 강사계 김호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끌어올려~     


진심을 다해 수업을 했더니 진심이 전해졌나 보다.     


종강 날 대다수의 학생들은 내가 하는 다른 연계 수업을 듣고 싶다고 했다. 퇴사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기에 나는 지금 강좌만 수업한다고 다른 선생님들도 너무 훌륭하고 재미있으니 즐거운 시간이 되실 거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나의 다음 수업 개강일은 언제냐며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냐는 학생들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여름휴가를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솔직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수업이 끝날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걸레를 빨고 있는데 학생 한 명이 다가왔다.     


“선생님 너무 감사했어요. 저녁 수업을 이렇게 밝게 하기 힘든데 너무 대단하세요. 선생님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게 수업에서 너무 많이 느껴졌어요. 너무 즐거웠잖아요~”     


그 외에도 끝까지 내가 하는 다른 수업을 듣고 싶다던 학생들, 선물로 받은 헤어에센스, 간식, 핸드크림. 학생들이 떠난 빈 강의실을 둘러보며 스스로 부족했지만 나름 괜찮은 선생님이었다는 생각과 속상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마냥 괴롭지만은 않은 순간이겠구나 싶었다.     


뒷정리를 하니 행정 선생님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들었다는 그녀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보안 유지 각서’     


수업자료와 그 외 기타 정보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참으로 재밌는 일이었다.


수업자료도 내가 책을 보고 인터넷을 찾아가며 만들었고 ppt 또한 혼자 만들었는데 보안 유지라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항목들을 읽다가 서명을 하고 그녀에게 준비했던 영양제를 건네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고 이렇게 나가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프리랜서이니 퇴직금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마지막 날 수고했다는 말 대신 보안유지 각서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나 이제 끝이기에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학원을 빠져나왔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니 아직은 선선한 밤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서씨는 원장실 출입금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