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목시계

by 김단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후덥지근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닥쳐온 여름에 진이 빠져 걷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약국을 지나 그 옆에 자리 잡은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음료수들이 진열된 냉장고 안에서 망설임 없이 캔 맥주를 하나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무리를 지나며 아차 싶기도 했지만 날 눈여겨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캔 맥주를 가방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정확히 7분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편의점으로 들어서기 전보다도 땀을 더 많이 흘린 나는 입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세탁기 옆 바구니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욕실.


찬물로 샤워한 후 냉장고에 넣어둔 캔 맥주를 꺼냈다. 곧이어 경쾌한 소리가 좁은 집안을 울려 퍼졌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맥주를 마신다. 아찔하게 목을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며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금세 피곤해졌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잘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자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잠으로 빠져들기엔 아쉬운 금요일 밤. 물론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주말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 밤은 한껏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난 토요일이나 일요일보다 금요일 저녁의 이 시간을 더 좋아했다. 어느새 캔 맥주를 손안에 쥔 채로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잠으로 빠져들기 직전 몽롱한 상태에서 그간 내 머릿속을 떠돌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하나둘씩 꿈처럼 떠올랐다. 환상처럼 펼쳐지는 생각이나 기억들 앞에서 무방비한 상태. 오늘은 이들이 내 주위를 점령해버리도록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다 눈이 떠지면 쥐고 있던 캔 맥주를 한 모금씩 나눠 마시기도 하면서.


눈을 감은 채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환상들에 끌려다니는 도중, 갑자기 내 머릴 스치는 한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 중 내 눈길을 잡아끌던 기억. 이젠 시간이 지난 만큼 그런 기억들은 흘려보내도 되는 것이었지만, 난 지금까지도 영 그러질 못했다. 아니, 아무렇지 않게 잊을 수 있는 그런 기억은 누가 시킨 듯 항상 나를 불러 세우곤 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쭉 뻗고 있던 다리를 오므려 포개고선 그 위에 맥주 캔을 감싸 쥔 두 손을 올려놓는다.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집안 공기는 텁텁한데도 내 몸은 한기를 느끼는 듯 미세하게 파르르 떨린다.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다시 후우- 내쉬며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렇게 하면 뜻 모를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이성이 깃들곤 했다. 시간을 보내며 터득한 방법이다. 다시 안정을 되찾은 나는 다시 그 기억을 마주한다. 그리곤 궁금해졌다. 왜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은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걸까?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손목시계 찬 손목을 떠올리고 있다.


생각에 젖어 맥주를 다시 마시려는 순간, 화들짝 놀란 것처럼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캔을 떨어뜨릴 뻔했던 나는 탁자 위에 맥주 캔을 올려놓고 전화를 받는다.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수화기 저편의 엄마는 내가 엄마를 부르자 다시 잠잠해졌다. 엄마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진이야."

"응?"

"…."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하지만 엄마는 쉽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한참 뜸을 들였다. “아니, 별일은 아닌데….”라고 길게 여운을 남기며 말꼬리를 늘이던 엄마는 다시 몇 차례나 망설이다가 잠긴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걔 말이야, 돌아왔더라고…."

"걔?"

"그래, 걔. 이주원이."


아, 하고 아는 체를 하던 나는 “뭐야, 깜짝 놀랐잖아.”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다시 수화기 저편의 엄마는 조용했다.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니?”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엄마도 참. 어차피 언젠간 돌아올 사람이었잖아.”


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갑자기 불현듯 예전 일이 떠올라 걱정이 된 나는 엄마에게 혹시 그 집에 가 보았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제야 코웃음을 쳤다.


“내가 거길 왜 가. 그 집 쪽은 이제 쳐다도 안 봐.”


언성을 높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안정이 돌아왔다. “그래, 엄마, 이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자.” 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엄마는 다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선 우리 모녀는 화제를 바꾸어 요즘 아버지는 어떠신지, 반찬은 안 떨어졌는지 등을 물으며 한 차례 수다를 떨고선 전화를 끊었다. 순서가 바뀐 인사말이었지만, 엄마는 다시 예전과 같은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자야 할 것 같다.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도, 불을 끄면서도, 침대에 누우면서도 수화기를 통해 엄마가 했던 말들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신경 쓰지 말자고 말하는 내 목소리까지도 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경 쓰지 말자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감았던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에서 비춰오는 가로등 빛, 달빛과 뒤섞인 밤의 빛으로 천장은 투명하지만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곤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15년은 긴 세월이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그러자 처음, 엄마가 속삭였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긴 세월이 흘렀다는 건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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