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한 과장님이 뜬금없이 우리 딸이 효녀야~하셨다. 무슨 말씀이냐 여쭸더니, 딸 대학등록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서(그날까지만 내면 되는 줄 알고 점심을 느긋하게 드시고 내려했는데 12시까지가 마감이었나!) 할 수 없이 재수를 하게 된 사건이다. 화들짝 놀란 과장님은 반차를 내고 학교까지 찾아가 사정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과장님은 딸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어이없는 소식을 들은 딸이, "괜찮아, 사실 나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된 거 그냥 재수하지 뭐..." 하며 아빠를 위로하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이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오랫동안 울었으며 꽤 긴 시간을 우울하게 지냈다고 한다. ㅜㅜ
과연 딸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붙었으니 그냥 갈까'란 생각이 재수하고 싶은 마음보다 강했을까? 원하는 대학에 가고는 싶었지만 재수를 해서 성적이 오를 것이라 확신이 들지 않았을까? 만약 올랐다 해도 합격한다는 보장이 100%는 아니었으니 재수할 용기가 나지 않은걸까? 아니면 정말로 아빠를 위로하느라 하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어쨌든 딸은 현재 재수 중이다.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바란다.
이 에피소드를 접하고서 도전할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상담을 하다 보면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능력이나 실력에 상관없이 무모할 정도의 상향 도전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도전은커녕 안전하게 하향 지원만 하는 사람이 있다.
J님은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잘 버티면서 나름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추가합격으로 붙었다. 나도 너무 기뻐서 J님은 얼마나 기쁠까 맘이 뭉클했다. J님의 예쁜 새 대학생활을 축하하는 마음과 이제 상담을 종결하고 J님을 만나지 못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그래도 J님의 마음이 전보다는 많이 단단해졌으니 충분히 즐겁게 지내리가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J님으로부터 온 톡이....
선생님...! 저 **대 등록 포기했어요. 2~3년 동안 학교 준비하면서 여러면으로 많이 지쳐서 학교에 가서도 활기차게 공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결정했어요... 공부는 계속하고 싶어요! 전심으로 도와주셨는데 다소 당황하실 거란 거 알아요. 다음 상담에 뵈요~
내 마음도 아프기도 했지만 J님의 마음은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나의 톡은,
J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니 선택한 길을 응원해야지요. 좀 속상하긴 해요. 그래도 제게 J님은 여전히 같은 존재이고 한결같이 예쁜 사람이에요. 삶의 길은 다양하니 돌아가더라도 하루하루 성장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담주에 만나요~^^
S님은 수시에 집중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주관적일 수도~) 원하는 과에 맞는 활동을 하며 고등학교 3년을 보냈지만 수시에 실패하고 전혀 준비되지 않는 채 치른 수능성적으로 진학을 했다. 조금만 공부를 하면 수능성적이 꽤 오를 것이란 전망에 재수를 권했으나 S님은 확고했다. 그냥 다니겠다고.
나는 J님과 S님의 선택이 처음에는 안타깝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충분한 능력이 있는 분들이 어찌하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자기 실력에 맞게 선택을 하는 것이 뭐가 힘들지?라는 생각이 강했었다. 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그들을 이해한 건 아닐 것이다. 그나마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분은 Z님이었다.
그분들 마음 전 충분히 이해해요. 떨어짐에 대한 두려움, 적응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해요. 그냥 아무 대고 붙기만 하면 가는 거예요. 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도전을 해도 100% 부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보다는 아무 데나 붙어서 가는 게 나아요. 그래서요, 저는... 약대를 충분히 갈 실력이었는데 한 번 실패하고 나서는 그냥 아무 데나 넣었어요, 당연히 합격했고... 1~2학년엔 대충 다니다가 3학년 때 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공부를 잘했던 나였기에 아르바이트는 과외가 적격이다 생각했지요), 잘 되지 않았어요. 학교 때문이었어요. 그 학교를 다니며 괴외를 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어요. 그때 제가 다니는 학교의 등급컷을 처음으로 알아보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1등급인 내가 5등급이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게 나였어요.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충격을 받고 다시 공부해서 의대에 들어갔잖아요? 사실 그 때도 더 높은 대학에 충분히 붙을 성적이었는데 안전하게 하향 지원한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을 거예요. 보통의 멘털 수준만 되고 이렇진 않을 텐데. 저 완전 유리멘털이에요. 상향지원은 꿈도 안 꿔요. 내 수준에 맞는 도전도 무시무시해요. 그때 주변에서 억지로 도전하게 하여 한 번 더 실패를 맞게 되었다면 아마도... 음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했을 수도 있어요. 믿지 않으시겠지만요. 유리멘털에 걱정투성이라 하향에 하향하면서도 아직 살아있고, 그리고 조금씩 마음이 강해지고 있어요. 이젠 다른 사람들에게 멘토역할도 많이 하고요. 저 같은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거든요~ 내게 맞는 높이로, 스피드로 살면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