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같이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갑자기 지인의 지인들이 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들은 특별한 점심을 준비해 왔다면서 의기양양했다. 나는 의외로(?) 낯을 많이 가려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과 식사하면 굉장히 불편하다. 소화도 잘 안 되는 듯하고... 아무튼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으나 붙임성 있는 그들은 나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의자도 따로 가져다주고 특별히 국도 예쁜 그릇에 단독으로 떠주었다. 본인들은 일회용 종이컵에 죽이며 밥이며 덜어먹었음에도 말이다.
점심특선 메뉴는 정어리쌈밥이었다. 워낙에 먹음에 관심이 없는터라 정어리쌈밥에 대한 호불호조차 없기는 했지만 그냥 먹자니 가시가 신경 쓰여 귀찮더라도 쌈을 싸 먹게 되었다. 많은 양의 정어리를 큰 통에 넣어 가져오다 보니 국물이 좀 많았는데 상추사이로 국물이 자꾸 흘렀다. 사람들은 손에 국물이 흐르는 것에 초연한 채 맛있게 먹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스커트에 국물이 떨어졌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먹을 때 음식이 입에 묻은 것 같으면 바로 휴지로 닦아내기 일쑤였기에(아! 내 성격이 더러워 보인다.....) 손에 흐른 국물은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티슈가 내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프랑스에 태어났어야 했다. 프랑스에 많다는 MBTI 성격유형이기도 하고~식사시간이 아주 길며, 반주로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부분에서 말이다. 학창 시절 즐거움 중의 하나인 '도시락 까먹기'가 내게는 불가능했던 이유도 밥 먹는 시간이 길어서였다. 5분이면 후딱 도시락을 먹어치우고 노는 친구들과는 달리 점심시간을 모조리 식사에 썼던 나였다. 지금 상황은? 천천히 먹으면 그나마 평균의 양을 먹을 수 있는데 만약 타인들의 식사시간에 맞추어야 한다면 그들의 1/3 정도를 먹게 된다. 그럼에도 모두가 식사를 마치는 듯하면 나는 잽싸게 밥그릇의 뚜껑을 닫는다. 얼마나 먹었는지 보이지 않게. 그리고 함께 식사를 마친 듯 일어선다.
정어리쌈밥을 먹는 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식사를 마쳤다. 벽에 기대어 부른 배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그들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다. 나는 눈치가 보여 "식사 마치셨으면 일들 보셔도 돼요. 저도 다 먹었어요..."라고 했다. 그들 중 한 분이 "아냐, 아냐. 아직 한참 남았네. 다 먹어야지. 아까운데. 쌈 싸 먹기 힘들면 비벼먹어. 내가 비벼줄게" 하면서 내 밥그릇을 가져간다.
'으악! 난 밥에 뭐 묻히는 것 싫어하는데...'(아! 또 내 성격이 드~러워보인다)
내 속도 모른 채 그분은 남은 정어리를 싹 내 밥그릇에 쓸어 담고 눈빛을 보낸다. '다 먹어야 해!'
나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웃으며 말한다.
"제가 느려서 그러지 잘 먹는답니다. ㅎㅎ 그럼 저는 계속 먹을 테니 말씀들 나누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한 분이 입을 여신다.
"내가 여기서 젤 언니니까 하는 말인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봐~ 자기 먹는 습관 바꿀 생각 없어? 사람들하고 같이 먹을 땐 말이지. 속도를 맞춰야지. 다른 사람들 다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민폐라고!"
아, 체할 것 같다.
"죄송해요, 그래서 아까 식사 다 하셨으면 일어나도 된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그만 먹을게요. 사실 너무 많이 먹고 있어서요"
"무슨 소리야, 다 먹어야지. 얼마 먹지도 않았구먼. 우린 신경 쓰지 말아. 시간 많아. 그냥 자기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어디 가서 욕먹을까 봐"
"다른데선 아예 다 뚜껑으로 가리곤 다 먹은 척해요. 바쁠 땐 더욱..."
"아니, 우리 앞에서 그럴 필요 없어. 아가씨라면 이해를 하지. 공주님처럼 먹는 것. 자기도 이제 웬만큼 나이도 먹었잖아. 아가씨처럼 그렇게 우아하게 먹을 필요가 있을까? 노력 좀 해봐. 빨리, 한 번에 많이씩 먹으라고"
나의 지인은 어쩔 줄 몰라하고 옆에 있던 다른 분이 내편을 든다.
"왜 그래? 먹다 체하겠어. 가만 보니 저분은 그냥 행동이 느려. 봐봐. 다 천천히 하지. 밥 먹는 것만 그런 게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고쳐"
"왜 못 고쳐.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바꿔야지. 같이 먹는 사람 밥맛이 나겠어. 저리 먹는 사람 앞에서 말이지. 참! 결혼은 했지? 시부모님이 뭐라 안 하셔?"
"뭐라 안 하세요. 포기하셨나 봐요 ㅎㅎ"
"남편은? 직장에선?"
"원래 이 모습이니 뭐라 하겠어요. 직장에서도 좀 천천히 먹는 건 알고 있지만 뭐라 하진 않아요..."
나야 처음엔 '저분, 선 넘으신 것 같다'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재미가 있어졌는데 내 지인이 너무 불편해해서 다시는 그들과 식사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 따끔한 말을 하신 그분이 고마왔다. '그래 어쩌면 진짜로 이렇게 맛없게 먹는 내가 민폐일 수도 있어'
딸이 농담 삼아(?ㅎㅎ)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유튜브 할 생각 없어? 대박 날 수도 있는데. 먹방 하는 거 본 적 있지? 엄마는 다이어트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엄마가 뭐 먹는 게 보여주는 거야. 식욕이 사라지게끔. 맛있는 음식도 맛없게 보이게 먹을 수 있으니까~어때? "
내가 민폐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장 동료들에게 물어봤다.
"내가 어제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중간 생략).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내가 그렇게 밥맛없게 먹어요? 진짜 좀 고칠 필요가 있을까요?"
"아, 그분 너무 심했다. 그 정돈 아닌데. 우리랑 큰 차이도 없는데. 이상하네. 그분들이 오히려 너무 빨리 드시는 건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 한데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분이 경우가 없다 생각해요. 나라면 기분 나빠서 같이 뭐라 하거나 그냥 나왔을 것 같아요, 식사가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경계를 넘어선 거라 생각해요."
다행스럽게 나의 먹는 모습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사실 내 동료들은 나와 비슷하게 먹는다. ㅎㅎ
가장 재밌는 반응은 이거였다.
"신기하네, 나는 내가 소식좌라 사람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랑 먹으면 본인이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민폐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많이 먹는 사람이 민폐라고만 생각했지요~"
나와 비슷한 언행을 하는 동료들과 있다 보니 내 식습관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가족들이야 뭐 그냥 패스~
한 낮,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고맙게 느껴졌다. 늘 하던 패턴을 잠깐 멈추고 돌아보게 하니까. 다른 시선을 주니까.
복스럽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확 바뀔 순 없지만 노력은 해보리라. 빨리 먹는 건 하기 힘들 것 같고 대신, 상담할 때 사람을 대하듯 정성껏 음식을 대해보리라~~~그리고 즐거운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