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흔한 일이다. 상담이란 직무 특성상 전화를 바로 받기가 힘들다. 뒤늦게 발신자를 확인하면서 연락을 하곤 한다. 이번엔 많이 반가운 분의 성함이 눈에 확 띈다. 만나 뵌 지는 몇 년 된 것 같다. 그래도 전화통화는 일 년에 5번 이상은 한다. 그런데 내가 먼저 연락드리는 경우가 드물다. 먼저 연락드리는 상황은 일이 생겼을 때다. 자문을 구하거나 부탁을 하거나... 참으로! 목적이 있는 연락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전화의 시작은 늘 비슷하다.
"선생님! 저예요. 무슨 일 있으신지요? 어떻게 전화 주셨을까요?"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한다는 생각이 내겐 강한가 보다)
"무슨 일이 있기는~그냥 했지. 잘 있지~?"
"네, 선생님은요?"
"나도 잘 있어. 어머님은?"
"나름 괜찮으세요... 그나저나 죄송해요"
(선생님과 통화하면 빠지지 않는 말, 죄. 송. 해. 요.)
"뭐가 죄송해?"
"제가 먼저 연락드려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매번 선생님이 먼저 전화 주시니..."
"무슨 그런 말을 해. 보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지. 그런 게 어딨어"
"그래도 어린 사람이 먼저 하는 게 도리인데...."
"아니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날이 너무 좋아서~"
"날이 좋아요? 장마철인데?"
"여긴 아주 맑아, 날씨가"
"그래도 덥잖아요~"
"시원해"
"혹시 숲길이세요?"
"응, 숲이라 그런지 시원하네~"
"걷고 계신 거예요? 그럼 설마 맨발?"
"맞아, 맨발로 걷고 있지. 아주 좋아. 그래서 생각났어"
"ㅎㅎㅎ 나날이 건강해지시겠어요~"
"그래야지, 잘 지내고 또 전화할게~"
"보고 싶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심플함에 부끄러운 소리를 하고 말았다. 말로 '보고 싶어요'라니! ㅎㅎ)
길지 않다. 선생님과의 통화는.
가만 돌이켜보니 어느 순간부터 쓸데없이 연락하는 일이 없어졌다.
친구들에게조차도.
문득 친구가 그리워져도 추억에 잠겨 홀로 접어버리거나
요즘 어떻게 지내나 너무 궁금하면 카톡을 보내는 정도?
누군가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오면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라는 걱정이 먼저 든다.
내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참으로 목적지향적이 되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이런 이유로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연락하는 가장 흔한 상황은 연애에서 나타날 것이다.
또 가만 생각해 보니 남편이 전화를 할 때도~
"왜 전화했어~?" 첫마디다.
"그냥~"
내가 감성이 점점 없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선생님께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이랬다.
"선생님, 제가 고민이 있는데요. 책을 내고 싶은데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어요. 하나는 가장 먼저 연락이 돼서 출간하기로 한 출판사와 뒤늦게 연락이 된 출판사가 있어요. 전자는 제 의견을 100% 반영하여 지금 원고 그대로 출간이 가능하지만 홍보부분에서는 좀 취약하고요. 후자는 홍보에서는 월등한데 출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을 대폭해야 돼요. 아무래도 제가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게 왜 고민인데...?"
"욕심인가 봐요. 마음은 처음 인연 맺은 이사님과 하고 싶은데, 큰 출판사와 하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으니... 욕심이겠지요?"
"간단한 문제야"
"정말요? 어떻게요?"
"동전 던지기 해~앞면이 나오면 전자, 뒷면은 후자"
어이가 없어지면서 푸하하 웃어버린 나는 그 문제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렇게 심플하시다.
선생님이 단순한 분이 결코 아니시기에 더욱 좋다.
아빠가 혼수상태였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식이 없다 해서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돼~사람이 죽는 순간까지도,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는 부분이 감정이야. 그래서 다 느끼셔. 나쁜 소리나 서운한 말하면 얼마나 슬프시겠어. 그러니 가장 예쁘고 좋은 말만 해드려. 그래야 좋은 마음으로 편하게 하늘나라 가실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