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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이델베르크로!

반백살 싱글언니 시간여행 (19)

나의 두 번째 고향 독일 하이델베르크!


1년 전 오늘 이 날은 드디어 나의 두 번째 고향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날이다. 이탈리아 배낭여행을 마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동생네 집에서 아기 조카와 3일 정도 같이 보내고 이 날 다시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그냥 이름만 불러도, 아니 누군가 이 단어 한 마디만 말하더라도 나는 울컥해진다. 나의 젊은 시절 20대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냈으니 더 그럴 것이다. 95년부터 99년까지 5년 동안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를 하면서 나는 많은 추억을 남겼다. 학기 중에는 매번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에 통과하여 이 학교에 남아있기 위해 다시 말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강의실, 세미나실 그리고 도서관에서만 시간을 보냈었다. 또 방학 때는 학기 중에 필요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ABB 공장에서 전기 두꺼비집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1학년때부터 졸업 때까지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어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추억이 더 애틋한 것 같다. 또 이 친구들과 방학 때 같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혼자였지만 그다지 외로움을 못 느끼고 바쁘게 보냈다.


나는 이 당시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한인교회도 있고 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한국 유학생들도 많지만 만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과 경제학과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거의 신학 또는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그리고 음악, 의학 쪽에 많다. 이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한국인과의 연결고리가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없기에 나는 수월하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어 학교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대로 시험을 통과를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한국 유학생들과 소통할 수는 있을 기회도 솔직히 많았다. 왜냐하면 우리과 바로 밑이 대학 카페이고 옆이 대학 식당 "Mensa"이기에 한국 유학생들은 내가 식당과 카페에만 가도 항상 한국말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 때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멀티플레이가 안되기에 내 신경을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무엇인가 할 수 없는 단세포를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과 특성상 많은 과목을 이수해야 했었고 또 학기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공부만 하기에도 벅찼었다. 그리고 독일말도 제대로 못하고 교수가 강의를 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다른 독일 친구들은 교수가 말하는 수식 하나만 보고 그냥 3차원, 고차원 그래프가 머릿속에 떠올라 이 모델에 있는 정책과 정책의 효과에 대한 토론을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 수식 하나 풀어서 그래프로 그리는 것도 벅찼다. 또 독일어도 잘하지 못하는 외국인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과 아니 독일 대학, 그보다 더 크게 보면 독일 교육제도가 그렇다. 매 시험에서 60% 이상을 넘지 못하면 과락이다.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과목은 다음 해에 다시 들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이 과목을 합격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런 과목이 여러 개 있으면 그야말로 낙제. 더 이상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다. 그러면 다른 대학으로 입학해서 공부할 수 있겠지만 대학이 속해 있는 연방주에서 공부하기는 힘들다.


나는 그 당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시험을 통과하고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거창하게 내가 무엇이 그러니까 어떠한 대단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낙오되지 않기 위해 죽어라 공부를 했다. 일부러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 당시 언젠가 경영학 조직론 시험이 있어 이해도 못한 채 조직론 모델을 몇 개 달달 외우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강의실로 가는 도중 얼굴만 알고 지내던 신학을 공부하던 목사님을 만나 시험 보기 바로 직전 안부인사 10분을 한국말로 이야기하다 내가 달달 외웠던 모델을 백지처럼 까먹어서 시험을 망친 적이 있다. 독일에서는 객관식이 아닌 모든 것이 글쓰기로 하는 논술형 에세이다. 그래서 정해진 시험 시간 내에 내가 쓸 내용도 논술형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 시험지에 그 문제도 내가 공부했던 모델이었다.  내가 준비했던 모델을 첫 단어 하나만 기억하면 논술로 쓸 수가 있는데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몇 개의 문장만 끄적끄적이다 시험을 겨우 통과한 악몽이 있어 그 이후에는 졸업 때까지 한국 사람들 보면 아는 척도 안 하고 땅만 보면서 인사도 안 하고 다녔다. 그 정도로 나는 독했다.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했기에. 한국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나는 같이 공부하는 외국인 친구인들과 많은 소통을 하면서 지냈다. 5년을 같은 기숙사, 같은 과, 그리고 같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으니 가족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1년 전 오늘 난 퇴사 이후 다시 혼자 배낭여행을 하면서 유럽으로 왔지만 제일 오고 싶었던 곳은 역시 나의 고향 하이델베르크였다. 코로나 이전에 매번 하기휴가 때 독일로 1주일간 여행을 오면서도 하이델베르크는 꼭 들른다. 올 때마다 한결같은 곳. 고향 같아서 그냥 좋다. 그때의 추억이 남아있어서.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옛 추억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중한 장소이다.


지금까지 난 싱글언니로 혼자이기에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잠을 자고 먹는 것이 힘들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동생네 약 3일 정도 있는데 나의 생활이 없고 나 자신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동생도 좋고 예쁜 조카들 특히 이제 갓 돌을 지난 예쁜 아기도 귀엽지만 함께 무엇인가 하기에 나 자신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 것 같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여독이 풀리지 않아 힘들었지만 동생네 집에서 쉴 수는 있지만 심적으로 쉴 여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이델베르크로 여행을 떠나는 날만 기다렸던 것 같다.


드디어 하이델베르크로 출발한다. 하지만 난 하이델베르크에서 7박 8일 동안 시간을 보낼 거지만 예전처럼 하이델베르크에 숙박지를 예약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로도 유명하지만 관광지로도 유명한 도시여서 호텔비가 비싸다. 그래서 나는 하이델베르크 인근 도시 에델바흐에 있는 펜션을 예약했다. 에델바흐는 넥카강변에 있는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하이델베르크 역에서 에델바흐로 가는 기차로 환승하면 예약했던 그 마을로 갈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역에 도착해서 표지판을 봤을 때 뭉클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 느낌. 그냥 따뜻했다. 표지판이 무엇이라고 뭉클 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 있는 표지판

이 날 나는 하이델베르크 역에서 바로 에델바흐 마을로 가는 기차를 환승했기에 나의 고향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환영받은 느낌이었다. 마음 같았으면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에 호텔을 예약하고 여기에서 1주일을 보내고 싶었지만 호텔비를 감당하기에는 이제는 백수인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내가 이때 예약한 펜션에서 나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내가 예약한 하이델베르크 인근 마을 에버바흐에 있는 펜션은 7박 8일에 320유로. 여기에 거실, 주방, 침실, 발코니, 세탁실까지 완벽하니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보통 하이델베르크 특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이 시즌에는 하룻밤 호텔비가 100유로이다. 그것도 아주 코딱지처럼 작고 구시가지에 있는 방들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삐그덕 삐극덕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2층 통째를 8일 동안 빌렸으니 완전 대박이었다.


그리고 이 펜션 주인 노부부는 내가 혼자 배낭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중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일단 독일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어서 좋았고 꼭 부모님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너무 감동이었다. 단지 이 펜션에 있던 유일한 단점은 산동네였기에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 버스가 한 시간에 딱 한 대만 에델바흐 기차역까지 간다는 점 그것이 단점이었는데 그런데 이것도 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에델바흐 기차역까지 걸어서 운동도 하고 가끔은 주인집 할아버지가 일하러 가시면서 나를 시내까지 데려다주시곤 하셨기에 불편한 것을 몰랐다.


하이델베르크 인근 작은 마을 에델바흐에 있는 펜션

오래전에 하이델베르크에 5년 동안 살았으면서도 넥카강변에 있는 에버바흐 도시는 처음이다. 펜션까지 짐을 가지고 이 길을 오면서 보니 길도 예쁘고 집들도 예쁘고 그리고 조용해서 좋다. 그냥 포근하다는 느낌. 그리고 11월 마지막이 주는 독일의 가을을 한눈에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


펜션 문 앞에 도착하니 마침 주인 할머니가 등산 갔다 오셨다고 반갑게 웃어주시면서 나를 2층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깜짝 놀랐다. 나는 그냥 방 하나에 주방만 사용하는 것으로 예약했는데 2층 전체를 통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감동 그 자체였다.


에버바흐 펜션 "Casa la Collina delle Ginestre"

8일 동안 나는 여기에서 나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세탁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집처럼 갖추어져 있기에 집보다 더 편했다. 테이블도 넓고, 빨래도 말릴 수 있고, 인터넷도 잘 터지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진짜 고향 엄마네 집으로 온 것처럼 포근했다.


짐을 풀고 나는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걸어서 강변을 따라 걸어서 마을로 들어가니 해가지고 어두워진다. 처음 와보는 에버바흐 마을. 그림같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에버바흐 마을 광장


독일 하이델베르크 인근 마을 에버바흐


나의 독일 여행이 시작되는 이 작은 마을 에버바흐. 나는 여기서 나의 추억 여행을 할 것이다. 30년 전의 추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것이고 앞으로의 30년에 대한 여행도 시작을 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인근에 있다는 자체로 나는 힐링이 되고 나를 다독여주었다. 고향은 이래서 좋은가 보다. 그냥 이유를 묻지 않아도 토닥토닥하면서 달래주는 것. 그것이 고향 아닐까?


하이델베르크가 나의 두 번째 고향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전에 한국에 살았을 때도 5년 동안 같은 장소에 거주해 본 적도 없다. 부모님 직업의 특성상 자주 이사를 했었기에. 그런데 내가 하이델베르크를 두 번째 고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나의 출신은 한국이어 당연히 태어난 곳 서울이 첫 번째 고향이라고 말한다. 나의 추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힘들었던 시절 힘들게 살았던 이 하이델베르크 아닐까 싶다. 생존하려고 애쓰던 나의 모습이 남아있던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1년 후 오늘은 다시 나는 생존하기 위해 무엇인가 하면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도 직장 때문에 이곳으로 와서 10년 넘게 한 곳에서 머물러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도 8년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러 본 적이 없는데 직장 때문에 이 집을 구랬지만 이 집이 좋다. 친구들은 서울과 동떨어진 이 집에서 벗어나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시골마을이 좋다. 앞과 뒤에 산이 있고, 조용해서 좋다. 그리고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래전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아남기 위해 추억을 만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추억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집이 좋다.


이 집에서 앞으로의 시간 여행을 어떻게 담고 추억을 만들지 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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