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고 하니 핏줄이 그러하온데
난 너처럼 뭔가에 그렇게 깊이 빠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취미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참 많이 들은 말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한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두 배는 기니까. 그래도 굳이 이유를 찾자면 '유전'이다. 나의 부모님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무언가를 좋아하고,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보고 배웠다.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아주 열렬히 좋아하는 방법을.
나는 이 글에서 이를 '덕후적 유전자'로 명명하고, 덕후적 유전자를 지닌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법에 대해 소개해볼까 한다.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요
내 인스타그램 바이오에 적혀있는 말이다. 엄마 아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일단 좋아하는 게 너무 많다. 나의 최근 관심사는 야구, 뮤지컬, 가수 겸 배우 P, 미스터 트롯,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드라마 비밀의 숲, 그리고 브런치 등이다. 하루에 이 모든 것의 업데이트를 따라가기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라다.
요즘 가장 집중해서 보고 있는 '야구'는 좋아하게 된 계기도 조금 특별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시구를 한다고 해서 처음으로 갔던 목동 야구장. 그 이후로 친구들과 몇 번 잠실에 놀러 가면서 그 연예인보다 '야구'에 진심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덕질은 또 다른 덕질을 낳는다. 마음속 방의 거주자들은 새롭게 생겨날 뿐, 결코 비어있는 방은 없다. 그래도 뭘 싫어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기보다 뭘 좋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인생이 낫지 않을까. 순간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확률이 조금은 더 높아질 테니 말이다.
이 좋은 걸 나만 좋아할 수 없지
혼자 하는 덕질은 조금 아쉽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좋아하는 걸 서로 공유하기를 즐긴다. 저녁 시간, 식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거실 티브이로 유튜브 앱을 켠다. 시청하는 영상의 주제는 여러 가지다. 동생이 좋아하는 BTS의 온라인 콘서트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재미있게 본 뮤지컬 모차르트의 넘버가 될 수도 있고, 엄마가 배우고 있는 시니어 교육을 위한 AI 로봇, 또는 아빠가 좋아하는 RC카의 레이싱 영상이 될 수도 있다. (일종의 전국 최애 자랑) 얼마 전엔 동생과 내가 유퀴즈에서 봤던 여성 댄스 듀오 올레디의 영상을 네 가족이 밤새 돌려봤다. 서로 인상 깊었던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 가족의 습관이자 루틴이다.
이렇게 겉핥기로나마 다양한 것들을 접하다 보니 '취향'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넓어진다. 서로 가볍게 의견을 나누면서 몰랐던 분야의 이야기를 알아간다. 가끔은 업무에 적용할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케터가 본캐인 나에게 이 시간은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일 뿐만 아니라 나의 '자산'이 된다.
일단 모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모두 '콜렉터'다.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서 좋아하는 무언가를 야금야금 모아 두고 있다. 방에 들어서면 바로 그 사람의 취향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엄마는 액세서리를 모은다. 전생에 니플러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는 아주 다양한 반짝이들을 좋아한다.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결코 아니란다. 엄마의 화장대 옆에는 액세서리 장이 있는데 색깔 또는 펜던트의 크기 별로 주얼리들이 정리되어있다. 실제로 화려한 액세서리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엄마는 액세서리와 옷을 매칭 하면서 혼자 만의 패션쇼를 즐기는 시간을 특히 사랑한다. 집 안에서도 극 ENFP
아빠의 방은 RC카 스튜디오다. 한쪽에는 RC카를 만드는 작업 공간이 있고 벽면에는 장식대 위에 RC카 몇십 대가 좌르륵 진열이 되어있다. 작업 공간도 아빠가 직접 세팅했는데, 조립이나 컬러링 등 세밀한 작업을 잘할 수 있도록 슬라이딩 책상 조명까지 스스로 만들었다. 그 공간만 떼어놓고 본다면 가정집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방 같다. 금방이라도 대단한 발명품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덕심이 듬뿍 묻어나는 공간이다. 이쪽은 극 INTJ
거실에는 엄마 아빠 두 분 공통의 컬렉션인 LP판이 있다. 학창 시절, 음악을 워낙 좋아하던 두 분이 하나 둘 모으던 것들을 합쳐 거실의 한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 당시의 시대와 문화를 반영한 취미기도 하지만 그걸 우리와 함께 듣고 공유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집안 곳곳에 이런저런 컬렉션이 있으니 '좋아하면 모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지. 내 방에도 마찬가지로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단박에 누구의 팬인지 알 수 있는 것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화장대에도, TV 옆에도, 침대 헤드에도, 책장에도..
그래서 덕후적 유전자 가족은 절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적당히 좋아하는 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덕후적 유전자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 좋아하면 끝을 봐야 하는 타입이다. 관심사가 생기면 관련된 모든 지식을 얻을 때까지 서치 하고, 어느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빠의 최대 관심사는 RC카다. 그것을 조립하고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캐'까지 만들었다. 아빠는 약 7백 명 팔로워의 RC카 인스타그램을 운영 중이고 얼마 전 유튜브 채널도 오픈했다. 영상은 촬영부터 편집까지 직접 한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배우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요즘은 퇴근 후 맨날 유튜브로 영상 편집 강의를 듣는다. 아빠는 RC카 레이싱 경기에 직접 나간 적도 있다. 동트기 전 새벽, 각종 장비와 RC카가 든 커다란 배낭을 메고 경기장으로 향하던 아빠. 꼭두새벽에 일어나 000 팬싸 줄을 서기 위해 집을 나섰던 나와 오버랩되는 광경이다.
엄마는 덕질과 재능을 결합해 시너지를 낸 타입이다. 어릴 적부터 노래도 좋아하고 가수도 (많이) 좋아했던 엄마. 대학 때는 대학가요제에 나가서 상을 탔고, 결혼 후에는 노래자랑 경품으로 살림살이를 장만하며 쏠쏠한 재미를 봤다. 나도 고등학교 때 한 번 라디오 노래자랑에 나간 적이 있다. 운이 좋게 우승을 해서 학교에 간식차도 쏘고 방송국도 갔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피는 못 속인다 이 정도의 반응이었지. 대학가요제 수상자 앞에서 주름잡아봤자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 뭐든 허투루 하게 되질 않는다. 매 순간 모든 것에 진심이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고, 또 누군가에게 그 에너지를 나누어주고. 그게 당연하고 또 그게 체질에 잘 맞는다.
며칠 전 두 분은 낚시를 10시간이나 하고 귀가하셨다. 쉬러 가는 낚시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지만, 집에 와서도 낚시 유튜브를 찾아보고 도시 어부를 시청하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그래서 덕후적 유전자가 무서운 거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