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ie 앤지 Nov 01. 2020

과몰입 마케터로 산다는 것

왜 그렇게 일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최근 넷플릭스의 에밀리 파리에 가다 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 작품을 보고 나에게 연락한 사람이 무려 넷이나 된다. 좋아할 것 같은 스토리라 추천한다고도 말했지만 주인공을 보고 내가 떠올랐다는 말에 문득 그 캐릭터가 궁금해졌다. 왜? 주인공이 어떤데? 하고 묻자 친구가 그랬다. "주인공이 마케터인데 일을 엄청 사랑하고 일에 심취해있거든." (닮았다는 말은 절대 아님) 


넌 되게 재미있게 일하는 것 같아. 넌 일이랑 잘 맞아 보여. 그러고 보니 뷰티 마케터로 일하면서 주위에서 자주 들은 말이었다. 문득 그 이유를 고민해봤다. 어차피 일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왜 나는 마케터인 내가 이리도 좋을까?



일단 많은 걸 접하는 게 일이니까

나는 태어나기를 본질적으로 좋아하는 게 너무 많게 태어났다. 브런치를 열었던 이유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마음껏 떠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심사가 많으니 그에 파생되는 생각들이 많았고, 취향은 또 다른 취향을 낳았으며, 그로 인해 얻게 된 인사이트를 업무에 적용했던 사례들도 많았다. 트렌드 센싱과 모니터링이 필수인 직종이다 보니 이것저것 찾아보고 깊이 파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과 딱 맞아떨어졌다. 많이 흡수해서 정제하여 떠들어야 하는 게 결국 마케터의 일이니 말이다.


예전에 영어 교육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앱 기획과 웹 기획 업무를 했었는데 그곳에서는 특별히 창의적인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에 맞춰 학기나 방학 프로모션을 짜는데, 품목이나 할인율도 정해져 있다 보니 새로운 사고를 적용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웹 카피나 디자인 콘셉 정도에 기획자의 의지가 들어갈 수 있었지만 큰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뷰티는 달랐다. 오자마자 그 무지막지한 속도와 도전정신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고, 다른 업종과의 콜라보도 빈번했으며 무엇보다 트렌드에 빨라야 했다. 유사한 제품이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매력도가 달라지니 기획자, 마케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마케팅 파워가 중요한 비즈니스에서 마케터로 일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그만큼 배울 것이 많다는 뜻이니까. 지금 하는 일은 마치 파도를 타는 서핑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큰 파도에 물도 먹고 몸을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일단은 '재미'가 있다. 내가 씹고 맛보고 즐기는 모든 것들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고, 심지어는 덕질을 하다가 접한 것도 인사이트로 이해해주는 곳. 사적으로는 일개(?) 덕후인 동시에 프로페셔널한 마케터로 살 수 있는 지금이 그래서 참 좋다.



과몰입하기 좋은 직무, 브랜딩

현재 브랜드 소속의 마케터이다 보니 대부분 브랜딩 기반의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결국 나의 성향과 잘 맞는 직무 같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끊임없이 독려하는 취미를 갖고 평생을 살았는데 일이라고 다를까. 브랜드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브랜드를 다듬고, 그렇게 잘 다듬은 걸 동네방네 자랑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몰입이 될 수밖에.

 

사실 입사 초기에는 '내 취향'과 '브랜드 이미지'의 갭이 큰 게 의외의 고민이었다. 귀염뽀짝한 걸 좋아하는 나와 시크하고 프로페셔널한 이 브랜드는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조합처럼 어색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 어색함이 고민이 된 건 무의식 중에 나와 브랜드를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 같다. 다행히도 지금은 유형(有形)의 이미지보다 브랜딩이라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물론 부부도 오래 살면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브랜드가 상호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부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건 결국 브랜드를 덕질하는 느낌과 같다. CD 한 장 더 사서 초동 기록 세워주고 싶은 것처럼 없는 살림에 뭐라도 하나 더 해서 얘를 더 알리고 싶고. 아껴봤자 내 돈도 아니지만 조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얘를 더 사랑해줬으면 좋겠고. 그래서 FGD 하고 집에 돌아온 날 밤 고객들의 신랄한 비평이 떠올라 잠도 설치고, 다음 날 회사에서 오전부터 부은 얼굴로 티타임을 빙자한 속풀이를 하고 그러는 거겠지. (우리 팀 모두 과몰입 인간들 흑흑)


덕질에도 탈덕이 있듯이 언젠가는 지금 머무는 이 곳을 떠나게 될 날이 오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열렬히 내 브랜드를 아껴주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같이, 함께가 좋아서

마케팅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작게는 팀원들끼리 머리를 맞대야 하고 크게는 전사의 조직과 다양한 소통을 해야 한다. 고객을 만나는 최전방에 있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내부의 이야기를 예쁘게 다듬어서 발신해야 하지만, 고객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내부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우리 브랜드는 특히나 새로운 것에 많이 도전하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크고 작은 미팅이 자주 생긴다. 볼륨이 있는 프로젝트라면 TF 형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오픈형 휴식 공간을 보면 마치 팀플을 하듯 우리 팀원들이 다양한 팀 사람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있다. 조직이 크지 않은 편이라 업무의 폭이 넓고 또 깊어서, 그렇게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누어야 하는 일이 많다.

 

이렇게 '함께'하는 업무는 사실 불편하다. 답답하고 속상하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생긴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부딪힌다는 건 결국 '소통이 된다'는 뜻이다.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과정은 힘들어도, 그 토론의 끝에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순간의 짜릿함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뿌려진 천만 가지 아이디어들 중에 우리랑 잘 맞는 것을 찾고, 그 원석을 우리끼리 부딪치고 싸우고 잘 가공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었을 때의 뿌듯함과, 그 가공한 보석을 고객들이 마음에 들어할 때의 쾌감. 그때 비로소 '함께'의 가치가 빛난다.



지금 시각은 새벽 2시 19분. 눈을 뜨면 출근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가득 쌓여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아직 가슴이 뛴다. 일에 대한 가치관은 개개인의 생각이 다르니 정답은 없다.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남의 돈 빌어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다시금 마케터 뽕에 취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이 글을 적어본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마케터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angiethinks_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