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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ie 앤지 Jan 15. 2022

외로움을 타면 왜 안 돼


28세 가을, SNS에서 ‘20대가 끝나기 전 꼭 해야 하는 일들’이라는 포스트를 보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런 리스트는 대체 누가 정하는 거람?) ‘원래 여행은 혼자 가는 게 제 맛이지’, ‘혼자 가면 얼마나 자유로운데, 배우는 것도 더 많아’ 그런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 나이가 되도록 나 홀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게 마치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도 여행쯤은 혼자 떠날 수 있는 진짜 어른이라는 걸 증명해보고 싶었다.


첫 목적지는 선망하던 도시 오스트리아 빈. 직항으로 가도 11시간 20분이 걸리는 꽤 먼 곳이었다. 한평생을 걱정인형으로 살아온 나는 머나먼 타국에 혼자 뚝 떨어진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준비를 더욱 철저히 했다. 

먼저 숙소부터 꼼꼼하게 알아봤다. 숙소가 있는 곳은 어떤 동네인지,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숙소의 방 구조는 어떤지, 침대는 어느 정도 높이이고 수납장은 몇 개 있으며 웰컴 푸드로 어떤 쿠키를 주는지. 온갖 블로그를 다 검색해가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당장 빈의 숙소가 눈앞에 펼쳐져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로.


여행 전날까지 짐도 꼼꼼하게 체크하고, 각종 서류도 다 프린트해서 파일에 넣었다. 상비약은 물론이고 혹시라도 여권을 잃어버릴까 봐 여권용 증명사진도 몇 장 챙겼다. 여행을 가는 것보다는 전장에 나서는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긴 준비와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비엔나 공항. 하지만 시작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길을 잃을까 봐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는데 네비를 찍고 간 주소지에 숙소가 없었다. 분명히 여기에 파란 문패의 건물이 있어야 하는데! 십오 분 동안 같은 길만 뱅글뱅글 돌다 ‘이 근방인 것 같다’고 웅얼거리는 택시 기사의 말을 끝으로, 나는 처음 온 나라의 낯선 길 한가운데 내려졌다. 그리고 엄청난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이십 분을 더 헤맨 끝에야 겨우 숙소를 발견했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에는 내 열쇠가 없었다. 키 박스에 이름을 적어 방 열쇠를 걸어둔다고 했는데, 내 영어 이름의 첫 글자인 A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피스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주인이 한다는 말이,


“Angela Park? 예약 내역이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연이은 변수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보며 주인은 더 차갑게 쏘아댔다. 예약은 제대로 한 거 맞냐, 우리는 오늘까지 빈 방이 없다, 바우처를 줘봐라.. 프린트를 다 해왔지만 캐리어를 열 정신도 없어서 허둥지둥 메일함을 먼저 뒤졌다. 손을 덜덜 떨면서 겨우 예약 확인 메일을 찾았고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사르르 표정을 풀며 말했다. 


“미안, 내가 부킹을 잘못해뒀네. 일단 오늘은 다른 방을 줄게.”


젠장. 그렇게 나는 다른 방에 먼저 짐을 풀었다.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4인 가족용 공간이었다. 커다란 거실 하나와 침실 두 개, 화장실 두 개. 이 넓은 곳을 혼자 쓰게 된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천장에 달린 유리창에는 어느새 똑똑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른 공간에서 홀로 그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너무도 쓸쓸했다. 나는 내 몫의 작고 안락한 방을 예약했는데. 나의 모든 계획과 예상이 어긋나 버린 상황이 서러웠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에피소드나 만들고 있다니! 나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목베개용 고래 인형을 꼭 끌어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드디어 예약했던 방으로 짐을 옮겼지만 나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허름한 샤워 커튼이 있는 공용 욕실을 보고는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다. 이렇게나 허술하다고? 사진으로 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호텔을 예약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리고 그날 밤 샤워를 하는 내내 미어캣처럼 긴장을 하고 열 번쯤은 뒤를 휙휙 돌아봤다. 나는 내가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왜 있잖아요.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처럼 갑자기 샤워 커튼 뒤로 누군가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근사한 브런치를 먹고 커피 하나를 테이크아웃해 멋지게 비엔나 거리를 거니는 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읽지도 못하는 말이 적힌 딱딱한 빵 하나와 물로 끼니를 때운 나였다. 심지어 그걸 사 오는 길에 어떤 놈들에게 캣 콜링까지 당했다. 대체 누가 혼자 하는 여행이 재미있다고 한 거야? 나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징징거리는 카톡을 보내고 사무치는 외로움을 애써 달랬다. 그리고 여행 카페를 들어가 무작정 동행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 쉽지 않았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다음 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안고 호스텔의 키친에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반가운 모국어에 고개를 들어보니 내 또래의 여자애 하나가 앉아있었다.


 “어머, 네네!”


나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힘차게 대답했다. 혼자 오신 거예요? 동행 있으세요? 그리고 속사포처럼 그녀에게 물었다. 


“네, 혼자예요.”

“악! 그럼 같이 다녀요!”


나는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녀와 단숨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맛있는 슈니첼도 사 먹고, 벨베데레 궁전과 빈 대학 같은 관광지도 돌아다니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면서 여행을 만끽했다. 빈에 처음 도착한 날과는 다르게 어느새 날씨도 맑게 개어있었다. 이제야 좀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프라하로 넘어가면서는 새로운 동행을 구했다. 이번에는 세 명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다들 쾌활한 성격이라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멋진 레스토랑도 가고 비어 뮤지엄도 가고 프라하성도 갔다. 중간에 또 다른 동행을 찾기도 하면서 나는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금세 익숙해졌다. 내 시간을 빈 빨대라고 한다면 포도맛 탄산이 들어왔다가, 달달한 초코우유가 들어왔다가 하는 느낌이었다. 쪼옵 빨아 마시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허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텅 비어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돌아오면 홀로 축 가라앉은 채로 잠을 청했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즐겁자고 온 여행이지만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애석하게도 ‘외로움’이었다. 혼자서도 다 잘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더 친구들을 좋아하고 누군가가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이십 대의 끝자락에야 그걸 깨달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지를.


어느새 여행의 마지막 날. 동행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앤지 씨가 먼저 떠나니까 아쉽네요. 그 말을 들으니 문득 빈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내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요. 한국 가서도 연락해요. 짧은 시간 친해진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아쉽지만 무겁지만은 않았다.



또다시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한국에 떨어졌다. 착륙을 하자마자 친구들의 카톡이 쏟아졌다. 도착했냐? 여행 언제 끝나? 가득 쌓인 알림이 반가웠다. 토돗토돗 답장을 보내자 누군가 물었다. 


[혼자 하는 여행 어땠어?]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답장을 보냈다.


[최악이었어!]


외로움을 타면 왜 안돼. 그저 내가 외로움을 타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채고 인정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20대가 끝나기 전 꼭 해야 하는 일은 혼자 여행 즐기기가 아니라 혼자 여행을 하는 나를 돌아보기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그 리스트는 누군가가 좀 정정해주면 좋겠네. 


나는 다시는 혼자 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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