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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ie 앤지 Feb 26. 2022

사무실에서 누룽지를 좀 먹으면 어때


작년부터 회사에 멘토링 프로그램이 생겼다. 한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가 멘티가 아닌 멘토라는 것. 언제 벌써 이런 나이가 되었지?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어느새 이곳에서만 8년 차.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무튼, 그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99년생 후배 하나를 만났다. 99면 나와 거의 띠동갑에 가까운 나이였다. (세상에) 첫 만남, 데면데면했던 우리는 MBTI 얘기를 하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저는 ESTJ요. ESTJ라니 저도요! 이거 우리 회사에 잘 없는 유형인데! 열 살이 넘는 나이차는 그렇게 ‘엣티제 연합’으로 쉽게 허물어졌다.


멘토와 멘티는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만나 무언가를 해야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니까 대개 점심시간을 이용해 후다닥 밥을 먹고 카페를 가는 게 전부였지만 희한하게 그 사소한 교류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다른 팀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 또래가 아니니 더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얘기들도 종종 나눴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결제를 했는데도 활동 지원비가 애매하게 남았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카페 계산대 옆 매대에서 누룽지를 발견했다. 웬 누룽지? 레몬티를 테마로 하는 카페가 어째서 누룽지를 파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룽지는 카페보다는 초록마을 어쩌고 같은 유기농 식품 전문점에서나 팔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그 부자연스러움에 어쩐지 눈이 가고 마음이 갔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고 누룽지 하나씩을 달랑거리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뾰로롱 울린 사내 메신저. 


[앤지님 누룽지 드셔 보셨어요? 그거 진짜 맛있어서 저 더 사 왔잖아요!]

[앜ㅋㅋㅋㅋㅋㅋㅋ그래요?!] 


후배의 들뜬 대화에 내가 웃음 가득한 답장을 보냈다. 벌써 먹었구나. 그나저나 귀엽네, 회사에서 누룽지를 먹는다는 게! 나는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내 곤드레 누룽지 봉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후배가 더 맛있는 맛(?)을 가져가라며 쥐어준 곤드레가 콕콕 박힌 누룽지였다. 얼른 먹어봐야 할 텐데. 그런데 어쩐지 용기가 안 났다. 집에 가져갈까? 그렇게 곤드레 누룽지는 며칠 동안 내 책상에 머물러있었다.



한 주정도 더 지났을까. 늦은 오후, 일을 하다가 진짜 입이 심심했다. 연이은 회의와 장표 작성으로 당도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고.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바로 그 누룽지였다. 갑자기 후배의 그 메신저 내용이 생각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누룽지를 쥐었다. 주변 눈치를 보며 살살 포장을 뜯고, 야무진 손가락 끝으로 누룽지를 똑- 하고 부러뜨려 작은 조각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으음?”


오독. 누룽지를 씹자 혀끝으로 고소하고도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뭐야, 진짜 맛있는데? 오독. 또 한 번 누룽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면서 누룽지를 녹이기(!) 시작했다. 혹시 소리 들렸어? 소곤소곤 옆 자리의 다른 후배에게 물으니 후배가 웃었다. 잉 아뇨? 하나도 안 들렸는데요?


“이거 진짜 맛있는데, 먹어볼래?”


나는 공범을 만들듯 은밀하게, 작은 조각으로 부순 누룽지를 옆자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주변 동료들이 애처럼 종알거렸다. 입 속에는 곤드레 누룽지를 넣은 채로.


그렇게 우리는 자리에서 얌전히 누룽지 한 통을 비웠다. 마치 엄잠후* 미션을 성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하기까지 했다. 누룽지를 먹고 나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도 같고, 삭막했던 사무실 공기도 어쩐지 누그러진 듯했다. 이게 누룽지의 힘일까. 아니, 같이 사고 또 먹은 사람들의 힘이겠지.



가끔 회사에서는 '사무실에서 누룽지를 먹는 일' 같은 미션을 마주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걸 해내야 할 때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쏟아질 때도 있고. 뭐 그래도 그냥 먹어버리면 그만이더라고. 신경 쓰는 건 결국 나뿐이고, 내 식대로 하다 보면 언젠가 답이 나오고.


사무실에서 누룽지를 좀 먹으면 어때. 

좋은 교훈을 준 멘티, 아니 멘토 후배에게 고마운 어느 날이었다.



엄잠후*

'엄마가 잠든 후에'의 줄임말. 모바일 콘텐츠사 피키캐스트의 대표 콘텐츠로 엄마가 잠든 후 몰래 야식을 먹는 콘셉트의 웹 예능이다. 일정 데시벨 이상으로 소음을 내면 벌칙을 주는 규칙이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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