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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너는 선임이란다

물가 아닌 불가에 내던져진 아이처럼

by angie 앤지

Q. 회사에 늘 있는 것을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있다가도 없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누가 한 회사를 10년이나 다녀요>

#03. 이제부터 너는 선임이란다



"오늘부터 네가 디지털 파트 선임이야."


분명히 내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를 커버해 줄 사람들이 언제나 내 곁에 든든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선배가 사라졌다. 그것도 둘이나. 어려울 때 물어볼 사람,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다니. 나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었다. 있다가도 없는 것은.


"아, 그리고 이따 전사 디지털 미팅 앤지님이 갔다 와."


네..? 가혹한 현실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미션이 떨어졌다. 지난 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때는 회사가 '디지털'에 꽂혀있던 시기였다. 매주 디지털어쩌구저쩌구미팅이 줄줄이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를 혼자 가라니. 그것도 우리 조직을 대표해서..? 다른 조직은 보통 디지털 담당자가 2명, 많으면 5명까지 있었고 주로 고연차 선배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역할도 잘게 쪼개져있어서 각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조직은 작았고, 담당은 나뿐이었다.


뫄뫄 브랜드 A 담당자 계신가요? 저요.

B 담당자는? 접니다.

C 담당자도? 저네요...


어린 주니어가 시니어들 사이에 앉아 울-고- 있-어-요. 엄마아. 엄마아. 집에 가고 싶어.. 그랬다. 회의만 가면 나는 몸이 잔뜩 경직됐고, 목소리는 염소처럼 떨렸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보며 자그맣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귀엽고도 안쓰럽게 봐주신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혼자서만 어리바리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나 속상했다.



"이걸 진짜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이런저런 회의에 끌려다니다가 결국 다른 선배에게 물어봤다. 이런 역할을 진짜 제가 맡아서 해도 되는 거냐고. 다른 조직은 멋지고 대단한 선배들이 많이 온다고. 그랬더니 선배가 그랬다. 대표님이 상황도 다 알고 계시고, 앤지님에게 바라는 건 그 정도인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아니, 바라는 게 그 정도인 건 또 뭔데요?ㅠ (약간 발끈) 그리고 그 정도만 하라니요!ㅠ (오열) 그 정도만 할 거면 그걸 왜 저한테 시키죠!?ㅠ (울분)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다. 물론 당연히 이 말들을 입 밖으로 다 꺼내지는 못했고.


한숨이 났다. 회의 생각만 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모르는 걸 물어볼까 봐 긴장이 되고, 혹시라도 바보 같은 답변을 할 까봐 걱정이 됐다.


김연아, 태연, 민지의 정신으로



그러나 별 수 있나. 나에겐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누가 물어봤을 때 몰?루 하지 않기 위해서..) 책도 읽고 교육도 가고 외부에서 강연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나 직장 동료, 같이 일하는 에이전시 분들에게도 질문을 마구마구 했다. 저 이거 잘 모르겠는데, 혹시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부족한 걸 인정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렇게 하나둘 채워가니 그제야 불안과 부담이 조금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어렵게 견뎌내던 어느 날.


갑자기 대규모 디지털 행사에서 케이스 발표를 하게 됐다. 실무자는 나였고, 발표는 무려 대표님이 하시는 자리였다. 왜 항상 한 고비를 넘으면 더 큰 고비가 나타날까 물론 회사에는 너무도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거대한 산과 같은 위기였다. 나는 아직 대표님과의 1:1 대화가 어렵기만 한 연차였고, 나와 조직의 성과를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게 처음이었다. 게다가 행사 준비부터 발표 자료 제작까지 수많은 외부 사람들과의 조율과 협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정도만 얘기해도 사이즈 나오시겠죠?ㅠ)


그래도 해야지 뭐 어떡해 22222 엉엉...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발표해야 하는 케이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결국 실무자인 나였다. 정신을 붙잡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가장 먼저, 했던 업무를 나의 언어로 먼저 정리하고 흐름을 컨펌받았다. 이어서 대표님의 피티용으로 워싱한 원고를 준비하고, 전문 업체와 함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결을 다듬으며 중간중간 대표님의 피드백을 반영했다. 행사 주최와 핏을 맞추는 팔로업 미팅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 아직도 회의실에 홀로 앉아 스크립트를 다듬고 피피티를 수정하던 그날의 조온습(ㅠ)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연차가 맡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다행히 행사는 잘 끝났고 결과도 좋았다. 내 손으로부터 시작한 작은 캠페인이 좋은 케이스로 남아 우리 브랜드의 성과를 자랑하는 계기가 됐다. 꼬꼬마 디지털 선임으로서 처음으로 매듭을 지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든든한 선배들 없이, 수 천 방울의 눈물을 닦으며 불가에 홀로 서서.


-


얼마 전 내가 운영하고 있는 마케팅 독서모임에서 한 멤버분이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아직 연차가 어린데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부담스러워요. 왜 저한테 그런 걸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위에서 00님에게 바라는 건 00님이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일 거예요. 그리고 00님이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시키시는 걸 거예요."


참나. 과거의 내가 들은 것과 너무도 비슷한 말이었다. 이제 와서 내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희한하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선배'의 말에 또 공감이 가더라고.



누구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시절이 있을 거다. 때로는 그보다 더한 불가에 내던져진 기분일 때도 있을 거고. 그땐 그렇게 어린 연차에 주어지는 책임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무거운 걸 들어봐서 지금은 좀 덜 무겁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그때 가벼운 것만 들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긴 해요^^)


싫든좋든 연차는 쌓인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한 손에 들 수 있는 게 몇 개인지는 결국 그 시절의 경험이 정해주는 것 같다. 특히 '어린 선임'으로서 혼자 부딪혀본 경험들은 11년 차가 된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된다. 누가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걸 따라간 게 아니니까. 나의 책임감으로, 스스로 배운 것들이니까.


그러니 오늘도 어린 선임, 홀로 선임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언젠가는 일이 거뜬히,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반드시 온다. 억울하고 서글픈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내공으로 단단해지는 날이 온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




(+)

하지만 일은 또 혼자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04화 TF 하려고 회사 다니세요?,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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