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나무(3) 까마귀쪽나무
2022년 8월 20일부터 9월 20일까지 제주에서 한 달을 지냈습니다. 섬을 천천히 걸으며 나무를 보고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 기록 가운데 이런 짧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정말 집집마다 어디에나 자라고 있는 구럼비. 서울말론 까마귀쪽나무. 잎이 가죽마냥 두툼하고 한창 열매를 맺고 있었다. 까마귀가 쪽 뽀뽀하는 나무라는 뜻인데 새들이 열매를 좋아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 2022년 8월 26일 메모
그때 제주에서 이 나무는 정말 흔했다. 마을 울타리 옆, 숲 가장자리, 길가. 집과 밭의 경계마다, 누가 심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 사람들은 이 나무를 구럼비라고 불렀다. 표준어로는 까마귀쪽나무. 엄밀히 말하면 ‘새가 열매를 먹고 씨앗을 옮기는 나무’라는 뜻의 까마귀쪽나무라는 이름 역시 제주에서 올라온 말이다. 가마귀쪽낭이라 불리던 이 나무는 표준어가 되면서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구럼비라는 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2007년 5월 18일 시작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 그리고 2012년 3월 7일 결국 발파된 구럼비 바위의 이름으로 먼저 알게 된 말이었다. 외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대개 투쟁과 파괴, 연행과 저항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런데 2022년 여름 제주에서 한 달을 살며, 집과 밭의 경계마다 흔하게 자라는 이 나무를 보고서야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구럼비라는 말이 제주에서는 특별한 고유명사이기 전에 생활 가까이에 놓인 흔한 말이라는 것을. 마을에서 나무를 가리킬 때도, 오래된 지명을 말할 때도, 사람들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말이었다.
발파된 바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름은 여전히 마을 어귀의 나무에서 숨 쉬고 있었다. 당시 뉴스 화면 속 ‘구럼비’는 거대한 전설처럼 떠올랐지만, 알고 보니 그건 사람들이 매일 스쳐 지나던 작은 나무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마 바로 그 거리감이었을 것이다. 제주에서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삶의 결 가까이에 붙어 있는 말인데,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낯설고 추상적으로 들린다. 어떤 분들에게는 구럼비 바위 투쟁 역시 끝내 자신의 일처럼 와닿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름이 낯설면, 그 이름이 붙은 상처도 쉽게 멀어진다.
구럼비라는 말은 하나로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제주에서는 이 말이 까마귀쪽나무를 가리키기도 하고, 해안의 넓은 바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제주어를 더듬어 보면 이 말은 구렁과 빌레가 겹쳐진 말이다. 구렁은 깊게 패인 곳, 물이 스며드는 자리를 뜻하고, 빌레는 넓게 펼쳐진 바위 지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럼비는 ‘깊이 파이고 넓게 펼쳐진 바위, 물이 고이고 스며드는 자리’이다.
까마귀쪽나무는 바람이 강하고 토양이 얕은 해안의 경계에서 잘 자란다. 구럼비라 불리는 바위 지형 역시 그런 조건 위에 놓여 있다. 물이 스며들고, 바람이 오래 머물며, 흙이 깊지 않은 자리.
이 나무는 그런 곳에서도 자란다. 아니, 그런 곳이기 때문에 자란다.
제주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이 섬은 중심에서 떨어진 변방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생태의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오히려 다양한 생명이 모이고 남아 있는 자리다. 바람이 강하고, 땅이 얕고, 조건이 까다롭다. 까마귀쪽나무가 자라는 자리와 닮았다.
그래서 이 나무를 보고 있으면 변방이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읽힌다.
견디기 어려운 곳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이 만들어지는 자리로.
까마귀쪽나무의 잎은 단지 두꺼운 것이 아니다. 해안 숲에서 물을 지키고 바람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다.
이런 잎은 녹나무과 식물에서 자주 나타난다. 식물학에서는 이를 라우로필(laurophyll) 또는 녹나무형 잎이라고 부른다. 두껍고 윤기가 강하며 끝이 뾰족하게 길어지는 형태. 비가 자주 내리고 공기가 습한 숲에서 물을 빨리 흘려 보내고, 강한 햇빛 아래에서도 조직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구조다.
제주 숲을 걷다 보면 이런 잎들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온다. 후박나무, 까마귀쪽나무, 녹나무, 생달나무 같은 나무들이 비슷한 윤기를 띠며 숲을 채운다. 잎을 뒤집어 보면 어린 잎에는 미세한 털이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까마귀쪽나무의 어린 가지와 잎 역시 은빛 또는 갈색의 가는 털로 덮여 있다가 자라면서 점차 사라진다. 이런 털복숭이 잎들이 모여 이루는 풍경이 바로 제주 난대 숲의 일상이다.
섬의 숲은 바람이 많고 햇빛이 강하다. 그래서 잎 하나하나가 물을 붙잡고 표면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숲 전체가 두툼하고 윤기 나는 잎들로 채워진다.
우리는 종종 숲을 나무의 높이로 기억하지만, 제주에서는 오히려 잎의 질감이 숲의 인상을 만든다.
여름이 지나면 까마귀쪽나무에는 작은 열매가 맺힌다. 처음에는 녹색이지만 익으면서 붉은색 또는 검은색으로 변한다. 크기는 콩알 정도.
이 열매는 새들이 좋아한다.
녹나무과 식물들의 열매는 대부분 핵과(核果, drupe) 형태다. 얇은 과육과 단단한 씨를 가진 구조. 과육에는 지방과 당분이 들어 있어 조류에게 좋은 에너지원이 된다. 식물학에서는 이런 방식을 내부섭취 산포(endozoochory) 라고 부른다. 새가 열매를 통째로 삼키고, 과육은 소화되지만 단단한 씨는 소화되지 않은 채 배설된다. 씨앗은 부모 나무에서 떨어진 곳이 아니라 새가 이동한 다른 장소에 떨어진다.
한국 남부 개체군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까마귀쪽나무가 조류에 의해 씨앗이 퍼지는 상록활엽수이며, 붉은 핵과가 다양한 열매먹이 새들을 끌어들인다고 보고한다. 실제로 조류가 씨앗을 옮기는 거리는 생각보다 길다. 수십 미터에서 수백 미터, 때로는 그보다 훨씬 먼 곳까지 이동한 뒤 씨앗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 어린 나무들은 부모 나무 주변이 아니라 숲 곳곳에 흩어져 나타난다.
제주에서 까마귀쪽나무는 숲의 중심보다 경계와 빈자리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집 울타리 옆, 밭 가장자리, 길가 숲 가장자리 같은 곳.
나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씨앗은 이동한다. 까마귀쪽나무에게 그 일을 맡은 존재가 바로 새이다.
까마귀쪽나무는 동아시아 난대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중국 남부, 대만, 일본, 그리고 한반도 남해안과 제주. 특히 해안 숲에서 흔하다. 염분과 바람에 비교적 강하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마을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위치는 우연이 아니다. 까마귀쪽나무는 숲의 깊은 내부보다 경계와 빈자리에서 먼저 자리 잡는 나무다. 새가 옮긴 씨앗이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숲의 중심이라기보다 숲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일본의 난대 상록활엽수림 연구에서도 까마귀쪽나무는 후박나무나 녹나무와 함께 숲의 구조를 이루는 중요한 나무로 나타난다. 이런 나무들은 파괴되거나 비워진 숲에서 다시 자라며 상록활엽수림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까마귀쪽나무는 단지 흔한 나무가 아니다.
숲이 무너진 자리에서 먼저 자라고, 그 뒤에 더 큰 숲이 자랄 수 있도록 길을 여는 나무다.
까마귀쪽나무라는 이름은 재미있다. 까마귀가 쪽을 뽀뽀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실제로는 까마귀뿐 아니라 여러 새들이 이 열매를 먹는다.
동아시아 난대 숲에서는 이런 관계가 특별하지 않다. 일본의 상록활엽수림 연구를 보면, 4헥타르 숲에서 확인된 식물 111종 가운데 많은 종이 새에 의해 씨앗이 퍼지는 나무였고, 약 15종의 열매먹이 새들이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이 숲에서는 바람보다 새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람은 씨앗을 무작위로 흩어 놓지만, 새는 숲의 가장자리와 빈 공간을 따라 이동한다. 열매를 먹은 새가 날아가 앉는 자리마다 씨앗이 떨어진다. 그 자리에서 어린 나무가 자라면 숲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확장된다.
까마귀쪽나무의 숲은 사실 새가 만든 길을 따라 이어진다.
일본과 제주 숲의 식생 연구에서는 이 나무가 후박나무와 함께 숲이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종으로 꼽힌다.
까마귀쪽나무라는 이름은 그 관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새가 다녀간 자리마다 이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제주에서는 이 나무를 구럼비라고 부른다. 구럼비라고 불렀을 때 소환되는 풍경들이 있다. 집 울타리 옆, 밭 가장자리, 누가 일부러 심지 않아도 마을 주변 곳곳에서 스스로 자라는 나무.
까마귀쪽나무는 숲 깊은 곳의 나무라기보다 사람이 사는 자리와 숲이 맞닿는 경계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이 나무의 숲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가 이동하는 길을 따라 조금씩 이어진다. 마을에서 숲으로, 숲에서 다시 다른 숲으로.
어쩌면 까마귀쪽나무라는 이름은 그 움직임을 가장 단순하게 말해 주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새가 지나간 자리마다 다음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다녀간 자리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것들.
눈에 보이지 않게 옮겨지고, 다른 곳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 삶들.
까마귀쪽나무는 이름도, 씨앗도, 상처도 옮긴다.
그리고 그 모든 이동 끝에,
어떤 숲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라우로필(laurophyll)
난대 상록활엽수에서 흔히 나타나는 잎 형태로, 두껍고 윤기가 강하며 끝이 뾰족한 잎을 말한다. 비가 많고 습한 숲에서 물을 빨리 흘려 보내고 잎 조직을 오래 유지하는 데 유리한 구조다.
핵과(核果, drupe)
과육과 단단한 씨앗이 분리된 열매 구조로, 과육을 동물이 먹고 씨앗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는 데 유리한 형태다.
조류 산포(endozoochory)
새가 열매를 먹고 이동한 뒤 씨앗을 배설하면서 식물의 씨앗이 퍼지는 방식이다.
난대 상록활엽수림
겨울에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넓은 잎의 나무들이 이루는 숲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남부·대만·일본 남부·제주 등 온난한 해안 지역에서 나타난다.
천이종(successional species)
숲이 교란되거나 비워진 뒤 먼저 들어와 자라며 숲의 회복과 다음 단계 식생 형성을 돕는 식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