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를 읽고
학부 1학년 때의 일이다. 학번을 대표하는 과대와 부과대를 뽑아야 했는데, 자연스럽게 남자는 과대, 여자는 부과대로 배정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의아했다. 여자가 과대를 하고 싶다면? 여자는 왜 꼭 부과대를 해야 하는 걸까?
의아함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냈고, 우리는 성별에 따라 과대와 부과대로 나뉘는 상하 위계를 없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남과대와 여과대의 평등한 질서로 바꿀 수 있었다. 비록 괴짜 학번이라는 별칭은 달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대학 생활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소심한 남자 학우들을 보고 선배들은 수위 넘는 장난을 쳤다. 삼삼오오 모여 학우들의 외모를 품평하기 일쑤였고, 어딘가 모르게 권위의식에 빠진 모습이었다.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의 페미니즘이 움트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답답하고도 분한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몇 년 전에 처음 들어봤으니 말이다.
처음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은 극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꼴페미’라는 모욕적인 이미지가 대다수였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경우, 사회적으로 받을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자 하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책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여자 아이돌은 그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진이 무참히 찢겨야 했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져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놈의 책 하나가 뭐길래. 그렇게 커진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페미니즘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 삶에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위계질서를 없애자는 운동이었다. 집안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 직업의 앞에 붙여진 성별을 없애는 것. 누군가에게 욕을 할 때, 누군가의 그룹이 비하되지 않는 것. 단지 그런 것들뿐이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늘 느꼈던 답답함과 분노의 근원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 억눌린 페미니즘을 일깨웠고, 페미니즘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찾아 나갔다. 성 역할로부터 기인한 평등 운동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만인에 대한 평등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그것이 내가 찾은 페미니즘이었다.
그렇게 교내 취업 준비반에서 우연히 한 선배를 만났다. 여러모로 아는 것이 많은 선배였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었다.
선배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으로 한정이 되어야 한다 했다. 다른 평등권 운동 - 예를 들자면 장애인이나 성 소수자 등 - 의 경우, 담화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외압이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경우, 유독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외압이 있다고 얘기했다.
선배에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얘기하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선배를 설득할 만한 논리적인 지식이 없었다. 물론, 선배도 나를 설득할 만한 지식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는 페미니즘 담화를 그쯤으로 마무리했다. 더 해봤자 감정 소모가 심할 것 같았다.
페미니즘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지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안타깝게도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페미니즘을 손쉽게 풀어낸 책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접했던 대다수의 페미니즘은 개인의 에세이 이거나 혹은 논문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차근차근하게 정리한 책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페미니즘 책을 찾다 좋은 기회로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를 받게 되었다. 내게 딱 맞는 책이었다. 페미니즘을 쉽게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조목조목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은이인 강남순 교수님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과 닮아있다는 것이 한몫한 것 같았다.
여타의 변혁 운동에 그 변혁의 범주와 내용을 분명하게 알기 위한 이론들을 치열하게 학습하는 의식화 과정이 결여된다면, 그 운동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설득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변혁운동의 지속성과 학장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강남순 교수님은 책에서 운동을 위한 이론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물론, 그 이론의 뿌리는 운동이 펼쳐지는 현장에 담겨있어야 한다며 말이다. 이제껏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찾은 것 같았다. 내 페미니즘에 대한 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 이론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떠올랐다. 이번에 실형을 선고받은 승리 게이트는 물론이요, MBC 입사시험 문제로 인한 사회적 물의, 생리대 담화에서 빠져야 했던 당사자들, 관행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으로 인해 작성된 부실 계약서 등 비단 ‘여성’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닌, 더욱 넓은 범위의 사회적 문제가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사회적 문제는 나의 페미니즘을 위해 내가 공부해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공정, 계급, 권력 등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책에서 나왔던 자크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개인적으로 꼭 알아보고 싶어 따로 메모해놨을 정도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에서 와 닿은 부분도 많았고, 더 알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알고 있던 것도 명료하게 알게 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페미니즘에 대해 물음표를 붙인다면, 분명히 나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 책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혹은 이 책이 편안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이란 사회적 시선에 사로잡혀 오인된 개념으로 자신의 페미니즘을 그대로 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관련된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고, 또 자신의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지은이 : 강남순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여성학
규격
136*205
쪽 수 : 324쪽
발행일
2020년 02월 20일
정가 : 17,000원
ISBN
978-89-356-6337-8(03100)
[원문 보기]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