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부끄러운 글이다. 어쩌면 지난 몇 개월을, 아니 지난 일 년을 회고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나만의 투쟁을 적은 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수단이 아니었으면 절대 털어놓지 않았을, 꾹꾹 내 안에 담고 살았을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거나, 보는 중간 얼굴이 화끈거리신다면 괘념치 말고 이 글을 꺼주시기 바란다.
먼저 나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시작하겠다. 빠른년생으로 태어난 까닭에, 매번 경계선과 가까운 일생을 살았다. 어린 시절, 진지하게 십이간지 ‘띠’를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적도 있다. 그때는 뭐가 그리도 심각했던 것인지, ‘빠른년생이면 나는 쥐가 아니라 소띠인가?’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내 정체성을 뒤흔드는 고민까지 이어졌었다.
특히나 내 생일 역시 별자리를 알려주는 사이트마다 다르게 배정이 되던 경계선에 있어서 더 심했던 것 같다. 물론 요즘은 그 경계선이라는 메리트를 활용해, 좋은 쪽으로 기술된 하루 운세를 믿곤 한다. 경계선 인간만의 특강점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년 전쯤, 한 가지 경계선이 더 생겼다. 모든 학점은 수료했지만, 아직 졸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학생도, 졸업생도 아닌 그 어디쯤 위치한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요즘 뭐하니?”라고 물어보면 “아직 학생이에요”라며 방어하곤 했다. 외부자의 눈에서 봤을 땐, 졸업을 안 한 학생이긴 하니 말이다. 물론, 아직 재학생인 친구들이 시험과 레포트로 힘들어할 때는 졸업생의 입장으로 놀리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경계선에 선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묘미라고나 할까.
그렇게 경계선 인간으로 살며 여러 재미를 봤었다. 새해가 되면 늘 친구들 보다 한 살 어리다고 얘기하는 것은 물론, 일 년쯤은 놀아도 괜찮은, 보너스 라운드를 가진 기분을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경계선 인간 역시 좋은 것만 있을 순 없다. 치기 어린 예전의 내가 경계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체성을 고심했으니 말이다.
최근 들어는, 경계선 인간만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나날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데 반해, 나는 여전히 취준생이라는 경계선 위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까지 가져왔던 경계선 중, 취준생이라는 경계선이 제일 우울한 존재인 것은 확실하다.
취준생이라는 경계선 위에서도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크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는 사람들로 가룰 수 있을 것 같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전자에 속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채워가며 살았었다.
하지만 경계선을 뛰어넘어 어느 집단으로 소속되는 것이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노력은 기본, 당시의 운도 크게 작용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일 답답한 것은 내가 여전히 경계선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취준생이라는 경계선은 한결 더 가볍게 느껴졌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러지 못했고, 답답함의 화살은 스스로에게 돌아가곤 했다. ‘왜 더 열심히 못 하는 거지’, ‘무엇을 더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왜 이렇게 모자라는 걸까’라는 식으로 말이다. 지난 시간 동안, 의식이 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그 최선이 어딘가로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지난 몇 개월간 소위 말하는 패배의식에 절려 있었다. 원서를 넣을 때도 지기 위한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공부를 할 때도 예전의 똘망똘망함은 지워진 채,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인 양 행동했다. 그렇게 마저 하기 싫을 때면 외려 소설책을 읽거나 뚱딴지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등 도피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피상적인 도피는 이제껏 내가 쌓아온 성곽을 무너뜨렸다. 예전에는 그리 어렵게 쓰지 않았던 글이 낯설게만 느껴졌고, 어디서 글감을 찾고, 어디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지도 까먹은 지 오래다. 아무 목적성 없는 도피는 내가 현실감을 잃는 데 일조하고 만 것이다.
지난 일 년간, 이제 만 이 년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나름 열정을 가지고 쌓아온 것들인데,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과거의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나를 괴롭혔다. 그런 현실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몇 번의 도피를 더 하기도 했고, 몇 번의 절망을 더 마주하기도 했다.
다시금 경계 인간의 묘미를 즐기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되찾고 싶었다. 골몰해 도출한 결론은 진부하게도 다시 내 리듬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지난 시간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해결하고, 안 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한 방안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이 행동의 변화에 시작점이 되길, 미래의 내가 이 글을 읽고 미래의 행동을 생각해보길, 그리고 만일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같이 힘을 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켰다. 경계에 있는 ‘그럴싸’한 인간들이 또 다른 하루를 스스로를 향한 비난으로, 혹은 자기 연민으로 소모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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