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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벅 May 19. 2023

폭탄주

나는 폭탄주가 싫다. 

예전에는 '폭탄주' 참 많이 마셨다. 다들 나름의 방법으로 폭탄주를 만들지만 맥주컵에 위스키를 적당히 채운 스트레이트잔을 넣고 맥주로 채우는 방법이 일반적일텐데 그 모습이 폭탄의 '뇌관' 같다고 해서 '폭탄주'라 부른다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폭탄주의 고유한 특징(?)은 '제조법'보다는 '마시는 방법' 아닐까 싶은데 잔을 놓지 않고 '원샷'으로 한꺼번에 들이켜야 폭탄주다. 홀짝거리면 그냥 맛 없는 칵테일이다. 이런 기준이라면 '소주 폭탄', '빼갈 폭탄'도 말은 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취기가 폭탄처럼 몰려와 '폭탄주' 같기도 하다. 폭탄주 두 세잔을 마신 후 담배라도 한 대 물면 정말 머리를 때리듯 취기가 한꺼번에 물려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굳이 권하지는 않는다. 사실 폭탄주가 빨리 취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도수가 높기도 하지만 다량의 술을 한꺼번에 들이켰기 때문 아닐까. 


오래 전에 자칭 타칭 '폭탄주의 원조'라 불리던 원로 정치인이 주재한 술자리 말석에 앉아 보았는데, 그 분 얘기로는 군사정부 시절 지역 사령관이 기관장들에게 위스키를 맥주잔에 가득 따라 돌리기에 '살아남기 위해' 지금의 폭탄주를 제안했더니 군인 답게(?) 좋아하더라면서 그것이 폭탄주의 시작이라고 하더라. 즉, '더 빨리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취하기 위해서' 만든 술(주법)이라는 주장인데 사실인지 여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날 연세가 제법 있으신대도 폭탄주를 대여섯 잔 끄덕없이 마시던 그 분 모습은 사뭇 인상적이었다. 




원래 폭탄주는 상관이 만들어 부하에게 '하사'하는 술이다. 군대 문화의 영향인지 폭탄주를 만드는 권한(?)을 '병권兵權'이라 했고, 이를 가진 사람을 '병권자'라고 했다. 대개 그 자리에서 벼슬이 가장 높은 사람이 '병권자'가 되지만 그 '병권자'가 '병권'을 누군가에게 넘겨 주기도 했다. 마치 군대 지휘관이 지휘관을 부관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폭탄주를 받으면 그 사람은 잔을 들고 참석자들이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일종의 인사말인 '폭탄사'를 하고 폭탄주를 들이켰는데 출세가 고팠던 우리들은 멋들어진 '폭탄사'를 해 보겠다고 미리 준비도 많이 했었다. 폭탄주를 들이킨 다음 빈 잔을 '병권자'에게 돌려주면 '병권자'는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폭탄주를 '제조'했다. '병권자'가 폭탄주를 제조할 때는 다들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할 때는 참석자들이 다 한 번씩 '병권'을 잡고 집행을 해야 그 술자리가 끝났다. 그 때는 당연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시트콤이 따로 없다. 


폭탄주는 철저히 상급자를 위한 술이다. 술잔을 스스럼 없이 돌릴 때는 술자리의 가장 상급자에게 자기가 마시던 빈 잔에 술을 한 잔 올리고, 상급자는 그 술을 원샷한 후 다시 돌려주면서 술을 따라 주었다. 10명과 회식을 하면 그렇게 적어도 열 잔 이상을 마셔야 했으니 상급자가 제일 먼저 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폭탄주를 돌리면 다 똑 같이 마시니 도리어 상급자는 편하다. 그런가 하면 술자리가 무르익고 취기가 돌면 상급자라고 분위기를 계속 주도하기가 쉽지 않은데 폭탄주를 돌리면 자연스럽게 술을 만들어 돌리는 상급자에게 주목하게 되니 세상이 자기 위주로 안 돌아가면 열 받는 부류들에게는 참 좋은 문화다. 




폭탄주가 싫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맛이 없다. 맥주와 위스키를 섞으면 칵테일이 아니라 그냥 맛 없는 술이다. 혹자는 좋은 위스키를 쓰면 폭탄주도 맛이 좋다 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쩌다 고가의 위스키로 폭탄주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또 비위생적이다. 대개 하나의 잔을 사용해 여러 사람이 차례로 마신다. 입술이 닿는 부분을 대충 닦는 시늉을 하기는 하지만 위생과는 거리가 멀다. 접시에 물수건을 얹어 폭탄주 받침으로 쓰기도 하는데 몇 잔 돌리다보면 흘러내린 맥주로 이미 흥건할 지경이다. 거기에 잔을 털거나 닦고는 다시 다음 잔을 만드니 위생적일 수가 없다. COVID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무엇보다 폭탄주는 대단히 폭력적이다. 술을 잘 마시든 못 마시든 똑같이 한 잔씩 돌리고 자기 순번이 되면 참석자들이 다 주목하는 가운데 '원샷'으로 들이켜야 한다. 술이 더 마시고 싶어도 내 순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더 마시기 싫어도 분위기 깨기 싫으면 억지로 마셔야 한다. 나는 위스키와 맥주 다 싫고 소주나 몇 잔 홀짝였으면 하는데 그런 취향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모인 기회에 주변 동료와 도란도란 얘기나 했으면 하는데 폭탄주 돌릴 때 '지방 방송'은 금물이다. 실제로 많이 혼났다. 


술은 음료이지만 술자리, 술 마시는 방법은 어쩌면 하나의 '문화'다. 오로지 취하려고 술을 마시는 만큼 서글픈 일이 있을까. 각자 좋아하는 술, 좋아하는 방법으로 마시면 된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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