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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벅 Jan 20. 2023

[로펌 일상] 3. 의뢰인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


간혹 법정에서 피고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실제로 흐느끼는 변호사가 있다. 검사실에서 의뢰인보다 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따지는 변호사도 보았다. 의뢰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는 변호사, 진정으로 의뢰인을 위하는 이상적인 변호사라고 보아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현실적으로 가장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조언하는 것이 변호사의 일이다. 같이 울고 화내는 일은 가족이나 친구가 할 일이지 변호사의 일은 아니다. 감정적으로 치우쳐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언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변호사의 직분을 망각한 처사다. 같이 울어 달라고 변호사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변호사를 시작했을 때 선배들로부터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니 매번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말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너무 성의 없는 태도 아닌가 해서 마뜩잖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도 점점 그 말에 동의하게 된다. 내가 사건 당사자가 아닌 만큼 좌절이나 분노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최대한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어쩌다 변호사 본인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 많은 변호사들이 스스로 변호하지 않고 다른 변호사를 선임한다. 사실관계나 법리는 당사자인 본인이 그 어떤 변호사보다 잘 알겠지만 사건의 당사자가 되면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직업인으로서의 변호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는 필요하다. 변호사 생활을 그만 두지 않는 한 사건과 당사자는 계속 만나야 하는데, 그 때마다 함께 분노하고 좌절한다면 그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업무와 내 생활은 구분되어야 하고 그래야 오래 버틸 수 있다. 병과 죽음을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의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가끔 변호사나 의사들은 돈만 밝히고 너무 냉정해서 소름끼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평생에 두 번 없을 경험이지만 변호사들은 거의 매일 그런 사건과 사람들을 만난다고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냉정한 경우도 많다. 예전에 오랜 기간 어떤 사건을 진행하면서 당사자들과 수 십 차례 회의를 하고 그 배 이상 통화를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나를 신뢰하고 의지했으며 나도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회사 경영진에서 어떤 이유로 당사자들에게 다른 로펌 변호사로 아예 바꾸거나 최소한 추가로 선임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렀다. 나는 심각한 표정의 시니어들에게 내가 직접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후 그들을 여러 장소에서 다시 만났고 그 때마다 그들은 변함 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로펌이 추가 선임되면 사무실 내에서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하다고 읍소했고 그들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몇 주 후 회사 담당자가 결국 다른 로펌을 추가로 선임하기로 당사자들이 다 동의했다고 전달해왔다. 솔직히 많이 서운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당연한 결정이다. 내가 서툴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의뢰인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아예 외면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들의 상황과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되 그들의 감정에 휩쓸려 객관성을 잃는 일은 피하는 그 어느 지점에 변호사는 서 있어야 한다. 




요즘 4개월 넘게 어떤 형사사건 하나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이런 케이스들은 거의 매일 무엇인가 대응해야 할 상황이나 검토할 자료, 골치아픈 고민거리가 생긴다. 고객 회사의 담당자와 하루에도 여러 번 통화를 하는데 그 때마다 그 사람의 걱정과 울분, 답답함이 고스란히 변호사인 나에게 전달된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 되뇌이지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오늘도 평소 한 시간이면 마칠 내용을 세 시간 가까이 고치고 또 고치면서 스스로 "또 열 받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작성한 내용을 나름 뿌듯하게 마무리해서 담당자에게 검토해 달라고 보냈는데 왠걸 반응이 신통치 않다. 보낼 때는 내 노력과 열정에 감동하겠지 싶었는데 비슷비슷한 내용을 왜 자꾸 보내느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느냐 하더니 잠시 후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보내온다. 의뢰인의 처지에 공감하며 동화되었던 마음이 일순간 반대 방향으로 달리려는 것을 느끼면서 또 한 번 "남의 일인데 너무 나갔구나"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세상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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