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코트 대신 새옷(군복)과 시작한 군의관 생활은 3년 2개월. 그중 8주가 훈련기간인데, 혹독하지는 않아도 5년간 병원에서 함부로 굴러 먹은 몸뚱아리가 어느정도 회복 될만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훈련을 마친 나는 생애 두번째로 건강한 상태였다. (제일 건강한 건 지금이다.)
하여간 그런 연고(?)로 인해 둘째가 도적처럼 들어섰다.. 어떤 계획도, 예비도 없이 들어선 둘째는 처음엔 부담이었다. 나에게도 그랬겠지만, 아마도 남편이 내려간 동안 홀로 육아와 펠로우 일까지 감당해야 하는 아내에게 더 그랬을 터였다.
그래서 날 되게 비난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각설하고, 군의관 1년차는 진주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군 군의관은 성적으로 임관하게 되는데, 내가 8명중 3등이어서 그나마 2년차 때 위로 점핑해볼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것.
1등을 했더라면 1년차부터 성남 비행장에서 있을 수 있었을텐데, 당시 동기 중에 날 때부터 군인이었떤 놈이 있어서 내 꿈은 좌초되었다. 사실, 그가 아니었더라도 안되긴 했을 것이다. 3등이었거든.
아무튼, 진주에서 서울까지는 고속버스 타는 시간만 무려 4시반이 걸렸다. 왕복이면 9시간이다. 거의 매주 주말마다 9시간을 고속버스에서 보낸 셈이다. 그렇게 매주 먼 거리를 오가던 나는 하필 첫째 돌잔치 때 북한군이 포격을 해서 발동된 경계 태세로 인해 못 올라가고 말았다.
완전군장 차림으로 영내 대기 명령이 내려와서, 군의관실에 있었다. 처음엔 살짝 긴장도 되었지만 고속버스도 4시간 반이 걸리는 진주에 북한군이 어느 세월에 오겠냐는 말을 시작으로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티비가 틀어졌다.
그리로 무한도전 토토가를 봤는데, 나는 꽤 세월이 지난 후 무심결에 진실이가 토토가를 못봤다는 말에 왜? 라고 했다가 뒤질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나는 2년차 때 청주에 소재한 항공우주의료원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살짝 경쟁이 있었지만, 격오지 점수에 더해 조혈모세포기증까지 하고 친절 군의관 표창장까지 받은 나를 이길 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청주에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캐나다에 연수차 한달간 가게 되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지금 애둘을 데리고 애니조나에 와있다. 그때도 지금도 아내는 혼자다. 혼자 한국에 있다. 아이 없이 혼자 한국, 서울에....
쓰다 보니 길어져서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