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하게 웃는 2학년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날이 좋다고 이마의 흉터 자국을 가리키는 아이의 얼굴에는 그 어떤 원망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대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맑은 웃음이었다. 이유를 들은 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엄마 아빠가 싸운 날에 제가 아빠가 던진 냄비에 머리를 맞아서 머리가 찢어졌거든요. 그래서 응급실에 가서 이마를 꿰맸는데 아빠가 처음으로 장난감을 사줬어요."
아이가 귀해진 세상에서 나오는 통계들은 한 아이에게 쓰이는 비용이 훨씬 늘었다고 말한다. 저출산이 지속되다 보니 낳는 아이 수는 줄었고, 생활 수준은 올라가면서 조부모, 부모, 이모 삼촌의 돈까지 한 아이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런 이야기와는 전혀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일상적인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이들. 장난감이 좋아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날이 제일 좋다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갓 대학교 1학년을 마친 20대 초반이 보는 지역아동센터는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낯선 봉사자인 내게 곧잘 다가와서 안겼고 지루한 공부 시간도 젊은 대학생이 가르쳐 준다고 하면 가까이 와서 앉아 연필로 삐뚤거리는 글씨를 적어보기도 했다. 그래서는 안 됐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센터장님은 외로운 아이들이니 너무 마음을 주지 말라고 하셨다. 잠깐 봉사자들이 스쳤다 가면 아이들은 쉽게 상처받는다고 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아이들이 기다릴 테니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짧은 봉사 기간 동안은 최대한 사랑을 주고자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얼마나 유효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땋아 준 머리. 선생님을 향한 하트라고 보여준 요구르트 병 뚜껑.
지역아동센터에서 폭력적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을 만난 뒤, 교육심리 관련 수업들을 열심히 찾아들었다. '행복한 아이'가 많아야 사회가 더 행복해질 텐데, 수업에서 접한 내담자들은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좌절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학대 속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동학대는 아이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청년들은 불행하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청년 사회적 고립 실태조사(2021)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1명 이상은 심각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보건복지부의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는 20대, 30대의 우울 위험군 비율이 각각 30.0%, 30.5%로 다른 연령층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했다. 특히 정신장애나 중독 문제를 겪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아동학대 등 부정적 생활사건에 노출된 비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누군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태어나는 아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아이의 수를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태어난 아이들도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지역아동센터, 종교시설에서 열심히 돌보고 있지만 아직도 폭력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너무나 많다. 그래도 최근에 이웃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가정폭력의 신호를 인지하고 대신 신고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안타까우면서도 반갑다. 이런 사례들이 대중에게 많이 노출될수록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친구가 가정폭력의 징후를 발견해 신고했다고 한다. 아이는 시설에서 보호받고, 아이의 부모는 적절한 교육을 받은 후 다시 아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월에 한 두 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무료 컨설팅한다. 그릇이 작은 사람이어서 정책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주변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날이 제일 좋은 아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어느 겨울 날 만났던 아이가 내게 가르쳐 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니. 어린이날인 오늘, 유독 그 아이가 생각난다.
- 참고 문헌 : 신예림, 김순규.(2023). 잠재프로파일분석을 통한 아동학대 피해유형과 청년기 정신건강.정신건강과 사회복지,51(1),9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