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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May 21. 2023

회사 밖은 지옥이다 : 대출을 거절당하다


퇴사한 후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은 퇴사자는 금융권에서 금치산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 내가 전문직 라이선스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겠지만 4년제 대학 졸업장 하나 덜렁 들고 나온 사람은 사회적 쓸모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퇴사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읽었는데 공통으로 하는 말은 '대출은 이빠이 해서 나와라~!'는 것. 상당히 야수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대기업 회사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지인 '(비교적) 저금리 대출'을 땡겨서 나왔고 그걸 고스란히 주식 계좌에 넣어뒀다. 매월 적금 갚듯이 갚고 있기는 하지만 이자보다 수익률이 좋으니 매우 만족한다. 대출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천 단위의 돈을 굴려 보겠는가!

* 금치산자 : 재산을 다스리는 것이 금지된 사람. 2013년 7월 민법 개정으로 금치산자 제도는 폐지되었다.



1. 신용카드 발급이 불가합니다

나는 면세사업자다. 이번 달 첫 종합소득세 신고를 마쳤다. 꼬박꼬박 현금영수증 처리를 해서 소득이 꽤 높게 나왔다. 그래서 단종 예정인 알짜카드 하나를 만들어 보려 했다.


'고객님은 신규 가입이 불가합니다.'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다. 신용카드 발급이 거절되다니. 원래 거래하던 카드사라면 상관없겠지만, 새 카드 발급이 불가하단다. '부가가치세 신고증명서'나 '청약통장 잔고'를 보여주면 된다고 하는데 나는 면세사업자라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실패.


청약통장에 300만 원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매월 2만 원씩 들어가게 세팅해 뒀던 터라 잔액이 3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돈을 채웠지만 예금잔액 증명서는 전일 기준으로 발급되는지라 재테크 카드 발급은 물 건너갔다. 그렇게 카드 단종 시간인 오후 5시가 넘어갔고 허탈함이 몰려왔다. 나는 카드 발급도 못하는구나.


2. 대출이 불가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의 신용등급이 좋을 리가 없다. 신용점수 평가 사이트에서 조회되는 내 신용등급은 또래들과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는데 '4대 보험'이 없어서 나의 신용은 엄청난 감가를 맞는다. 퇴사 1년쯤 되었으니 현금 흐름도 안정되었겠다, 목돈 대출을 받아서 주식에 던져 넣으려고 했는데 대출 가능한 곳이 없다. 그나마 가능한 건 300만 원 한도의 생활비 대출 정도.


나의 능력을 증명해 줄 라이선스가 없다. 아주 엄청난 고소득을 올리는 사업자라면 은행에서 얼른 대출받아가시라고 달려오겠지만 지금의 나는 은행 창구에 가면 발가벗겨져서 분석을 당하는 신세같이 느껴진다. 소득은 회사 재직 시절의 실수령액보다 높지만 이것이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용할 수 있는 은행 상품도 없다. 사업자 대상 대출도 사업자 설립 1년 이후부터 가능한데 아직 설립 1년이 안 됐다. 이것도 실패.


3. 현금. 무조건 현금.

나는 조금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 현금이 있으면 쓰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환전성이 떨어지는 주식에 어떻게든 돈을 넣어두고 절대 빼지 않는 것을 나름의 재테크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현금이 없어서 아주 곤란할뻔했다. 문제 검수를 부탁드린 선생님들께 작업료를 입금해야 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거래처의 입금 시기가 늦어져서 현금이 모자랐던 것이다. 부랴부랴 다른 계좌에서 돈을 끌어와서 작업료를 지급하긴 했는데 모골이 송연했다. 대출도 안 되고 주식은 현금화하려면 7일 정도가 걸리는데 무슨 생각으로 거래처가 제때 입금할 것이라고 확신한 거지?


아주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돈 달라는 말을 하기가 참 껄끄럽다는 것. 회사 다닐 때야 월급날 통장에 '(주)ㅇㅇ' 이름으로 돈이 꽂히는 게 당연했는데 퇴사하는 순간 내 현금 흐름은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언제 입금해 주겠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밀리기도 하는 것. 그런 일을 몇 번 겪었어도 카드 대금을 못 맞추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으레 그랬듯이 현금이 생길 때마다 주식에 밀어 넣고 있었는데, 정기적으로 인건비를 지출할 일이 생기면서 아주 곤란할 뻔했다.


퇴사 이후의 삶이 아주 달짝지근한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퇴사를 한다는 건 회사에서 제공하던 모든 서비스에서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매끼 식사, 통신비, 법인카드, 보험혜택, 연금, 주말 등 모든 게 사라진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온전히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날이 없음을 의미한다. 매 시간이 고민의 연속이고 안정적인 삶에서 떠나 야생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미생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회사 밖은 지옥이다.


그런데, 이런 지옥은 꽤나 괜찮다! 내가 관리만 잘하면 되는 거니까.

평일 오후에 카페에서 책 읽는 퇴사자의 삶,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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