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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름 Feb 13. 2024

곧 인생의 황금기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괜찮아요


얼마 전 글 쓰는 모임에 다녀왔다.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나이와 직업을 얘기하는 자리는 없었는데 이 모임은 조금 달랐다. 몇 년생을 먼저 말하고 나이와 직업 등등 시시콜콜 소개하는 분위기였다. 다녔던 모임들에서 이런 걸 왜 묻지 말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주제로 모였다면 그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한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나이에 신경이 쓰였고 그중 모임을 오래 나온 사람이 “동년배끼리 통하네요.”를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럴 때마다 늙은 사람이 되어 앉아있는 듯했다.


문득 무례함이 전부였던 한 여자가 떠올랐다. 나랑은 세 살 차이인 그는 당시 32세의 내게 ‘늙은 여자’라고 했다. 지금 그는 그때의 내 나이보다 한참이 지났다. 여전히 무례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휘감고 있겠지. 글 쓰는 모임에서 연거푸 ‘동년배’ 타령을 하던 29살의 여자에게서 오래전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언짢음은 거기서부터 비롯되었고 묘한 이질감이 생겨서 그들의 글이 와닿지 않았다. 각자의 글을 쓰고 돌아가며 읽은 후 ‘좋았어요’ 뿐이어서 모임의 결도 나와는 맞지 않았다. 결원이 생기길 기다렸다가 참석했는데 아쉬움이 컸다.


나이에 얽힌 일은 다른 모임에서 또 있었다.

“여자 나이 35세 넘으면 출산이 어렵죠.”

자기도 35세에 가까운 미혼 여자분의 발언이었다. 당최 말을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저격하는 말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모임에서 기혼 여자들의 임신 얘기가 나오던 중에 들은 말이었기에 영 불쾌했다. 이 밖에도 찜찜했던 말들이 몇 개 더 있어서 이 모임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불편함만 남는다.


사실 나이에 대한 압박감을 올해 초부터 느끼고 있었다. 유연할 줄 알았는데 나조차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부정이 서럽게 우는 장면의 대사가 한동안 맴돌았다. 나 역시 마흔 즈음에는 무언가가 되길 바랐는데 아무것도 되지 못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네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내 자랑이야.”

울고 있는 부정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아빠도 살아계셨다면 내게 똑같이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말이 어쩜 그리도 슬프던지 대사가 가슴에 깊게 박혀서 뻐근하게 남았다.


어느새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이가 되었고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다 유튜브 영상에서 이금희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이금희 아나운서는 마흔한 살이 되었을 때 남들의 시계로 자기 삶을 보면 불안했다고 한다. 그때 어떤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부터 인생 황금기예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열 살 많은 분의 말에 믿음이 갔고 정말로 10년이 좋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51세가 되어 다시 그분을 만났는데  “어떡하지? 지금부터가 진짜예요.”라고 했다고 전했다. 나도 이 말을 믿어보려 한다.


나이에 대해서 운운하는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힘이 빠진 체 지냈다. 그러나 지금이 제일 어린 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황금기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황금기가 지나면 더 진짜인 순간이 또 남아있고. 앞으로는 어디선가 ‘동년배’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면 슬며시 그 자리에서 나와야지. 

'언니는 이제 곧 인생의 황금기란다!' 

때론 별거 아닐 수 있는 일에도 힘이 들 때가 있다. 결국 나를 지켜내는 건 언제나 나다. 

"나한테는 내가 있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려 본다.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괜찮다.




드라마 '인간 실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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