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는 나를 '내 이모'라고 부른다. 처음 내 이모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많은 이모중 키워준 나를 특별하게 구분하는 어린아이의 깜찍한 자기 주장이다. 내 이모에서 확장된 내 엄마를 찾으며 엄마와 껴안고 뽀뽀하는 아이를 보며 왜 부러웠던 건지.
나는 어릴때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사이라기보다 혼자 엄마를 원망했다. 서먹하고 불편했다. 딸 여섯중 둘째인 나는 조용하고 순종적이었던 탓인지 매년 2,3달을 외갓집에서 지냈다. 혼자 친구도 없이 온종일 근처 학교 운동장을 배외하고 강가를 쏘다녔다. 그때의 외롭고 적막했던 감정은 아직도 겪고싶지 않아 혼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어린 날의 기억속에 내 가족보다 외갓집 가족과의 일상이 더 많이 남아있다. 가끔 동생들이 말하는 어린시절 기억을 들으며 저 속에 내가 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때도 많았다. 강렬했던 외가에서의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이면서 적막한 기억이기도 한 이중적인 기억이다.
따뜻한 엄마품이 그립던 어린시절,
엄마가 밥먹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있다. 그날따라 밥상은 찬밥에 물을 말아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늦은 점심에 허기져 허겁지겁 먹는 나에게 외출했다가 늦게 들어와 차려준 밥에 못내 미안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울컥 목이 메던 그 기억은 '엄마가 나를 좋아하는구나.'하는 한조각의 믿음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먹은 나는 아들에게 좋은 엄마였던 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너를 사랑해."하며 안아주고 싶던 마음만 가득하고 현실은 다 커버린 아들을 눈만 껌뻑이며 쳐다보게 되는 거다. 받아보지 못해 내어주지 못하는 거라고 여전히 나는 엄마를 원망했다.
최근에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갔다. 주무시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주일간 위장에 생긴 위궤양으로 인한 수많은 상처들을 치료하느라 힘든 입원을 견디고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반쪽이 되었고 반짝반짝 총명하던 눈빛은 지치고 쪼그라져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린 노인이 앉아있다. 가슴이 울렁, 눈이 찌릿하다. 이러다 어느날 엄마가 없는 그런 날이 결국 오고야 말겠구나. 우리 엄마, 칠남매를 산전수전 겪으며 키웠는데, 아빠는 여섯이나 되는 딸을 누구하나 할거 없이 금지옥엽 안고 어르고 달래며 키웠지. 그렇게 정성 들이이지 않은 자식이 없었는데.
괘씸도 하지.
둘째 딸이 그동안 헛생각에 사로 잡혀있었구나 싶어 죄책감이 든다. 엄마의 병원행 이후로 오랜만에 온 딸을 앉혀놓고 "나하고 얘기 좀 하자. 내 말 좀 들어 줘."라며 중요하지도 않은 동네 이야기로 다양한 썰을 푸는 엄마를 본다. 외로웠구나. 내 엄마 외로웠구나. 자식 많아도 제 자식들 키운다고, 공부해야 한다고 노부모 들여다 보는 자식이 없구나. 그래서 많이 외롭구나. 그런 생각에 가슴으로 눈물이 찬다. 가슴으로 울며 입꼬리는 올리고 엄마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준다.
어릴 때는 우리 엄마보다는 우리 언니의 엄마 같았던 엄마다. 장녀가 잘 되어야 한다고 모든 정성을 올인하다시피 했던 엄마는 언니의 엄마였다. 꽤 오랫동안. 언니의 아이들은 키워줘도 내 아이는 힘들어 못봐 준다던 엄마였다. 아이와 아파서 함께 입원해 있던 그때도 나는 손을 내밀수 없었다. 해 본적 없는 어리광은 영영 돌이킬수 없고 마음은 이미 섭섭함을 넘어서 버렸다. 그랬었다.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며 응급실로, 달려가고 입원을 하고 사경을 헤매는 일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조금 정신이 든다.
늙어 쪼그라진 엄마와 앉아 억지로 끌어올린 입고리로 미소지으며 바라본다. 늙은 엄마가 드디어 내 엄마가 되어 앞에 있다. 중요하지 않은 수다를 하고 또 한다. 얘기가 맴을 돈다. 그래서 더 슬픈 내 엄마와의 행복한 시간이다.
같은 말 계속 해도 다 들어줄께.
엄마, 내 엄마.
오래 오래 우리 곁에 있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