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방정이다.
매년 결혼 기념일이 다가오면 농담처럼 "이렇게 슬픈 날, 내 인생 저당 잡힌 날이니 조기를 계양해야겠다." 며 남편을 놀렸다. 그러면 재미있어 했던 남자, 그 남자가 없는 결혼 기념일이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진짜로 이렇게 슬픈 날이 될 줄 알았다면.
나는 아침부터 마음이 심난하고 그가 보고 싶다. 아무도 기억 못하고 나만 기억하는 슬픈 날, 결혼 기념일이라고 꽃을 사 주거나 선물을 준비하는 남자도 아니었고, 가족 외식이나 하면 잘 보냈다 싶은 날이 결혼 기념일이었다. 남편은 왜 나만 선물해야 하냐고 물었고 나는 당신과 살아 주지 않냐고 고마워해야 하는 거라고 대답했었지. 당신이 나와 살아 주는 거였는데 말이야. 덕분에 결혼 10주년에는 내내 계획했던 유럽여행을 아들과 둘만 다녀왔다.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남편이 미워서. 그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최근에는 내 마음이 조금 변했었고, 선물 못 받으면 어떻냐고 이렇게 편안한 날들이 좋지 않냐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였다. 그와 둘만의 여행을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그는 미처 알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 20주년에는 함께 유럽의 거리를 거닐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그를 놀래 주려고 적금도 넣었다. 모두 꽝이 되었다. 그가 나를 떠나 버렸다.
오늘도 여전히 춥다. 평생 추위를 모르던 나는 남편을 보낸 후 추위를 얻었다. 뼛속까지 춥고 시리다는 말을 실감한다. 살이 에이고 추워서 자꾸만 움츠려든다. 나는 너무 추워서 다가 올 겨울이 두렵다. 그가 없는 겨울이 무서워 울고 싶다. 그는 지금 추운 바람을 맞으며 헐벗기 시작하는 먼 산을 바라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납골당으로 달려가고 싶던 마음을 주저 앉히며 종일 울고 있는 나를 그래도 기다리고 있을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꾸 찾아가는 것이 맞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무뎌질 줄 알았던 상처는 더 벌어지고 찢어진다. 점점 벌어진 상처는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흉터로 남을까? 오늘도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날이다. 오늘은 입방정 떨며 슬픈 날이라고 했던 바로 그 결혼기념일이다.
이 정도의 통증이면 중환자다. 나는 원인이 정확한 불치병을 앓고 있다. 애써 잊으려고 쏘다니고 무언가 일을 벌여도 그때 뿐이다. 다시 혼자가 되거나 어떤 날이 다가 오면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듯 무너지고 아파온다. 명절을 앞 두거나 결혼 기념일, 남편의 생일, 아들이 아픈 날 등 끝도 없는 어떤 날이 다가오면 그가 있을 때는 아무날도 아니었던 그날이 가슴시리게 절절해진다. 그런 날이 특히 못 견디게 아파 밖으로 나오지만 결국 차 안에서 통곡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다.
집안 곳곳을 정리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쓸고 닦고 정열하고 묵은 때가 오랜만에 모두 벗겨지고 집은 환골탈퇴했다. 새 집처럼 쾌적하다. 남편의 물건이 비어버린 공간은 다시 물건이 차기 시작했다. 아이와 나의 공간이 늘어났다. 잊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이 남편의 옷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체취가 묻은 물건을 정리했다. 도저히 버리지 못하는 몇 가지 물건은 깨끗하게 닦아 통에 넣어 보관하고 평범했던 어느날 무심히 사다 준 그래서 더 의미있던 선물, 목걸이는 내 목에 다시 걸렸다. 차마 결혼반지는 끼지 못하겠기에 빼서 서랍에 넣었다. 이런 행동의 의미는 잘 모른다. 이미 머리는 정지했고 심장이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다 치웠다고 그래서 안정을 찾으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나오는 어떤 조각이 심장을 찌르고 든다. 사소한 종이 쪽지에 적힌 그의 글씨라던가 예전 행사의 조카사진 속에서 웃는 남편을 만난다던지 하는 우연은 예상 못한 우연이라 덜컥 내려 앉는 심장을 애써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이런 일은 아마도 남편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영원히 치유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치유 불가능한 병, 원인은 알지만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이별 후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