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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 Jan 12. 2024

그걸로 나는 유일해진다

그깟 돈에 꿈을 팔지 마



   키토(Quito, 에콰도르Ecuador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코토팍시 화산(Volcán Cotopaxi) 정상까지 가는 여행사를 찾는 일이었다. 왜 코토팍시에 꽂혔는지, 그 전에 어떻게 이 산을 알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한 가지 확실히 기억나는 건, 에콰도르를 떠나기 전에 코토팍시의 정상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에콰도르 입국 전에 코토팍시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활화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5,897m), 페루의 69호수에서 고산병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나는 평생에 단 한 번뿐일 세계여행에서 단 한 번일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 나중에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이 코토팍시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높이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산에 미쳐 있었고, 세상을 꺾지 못한다면 어둠 속에서만 허락된 높은 곳에서 아이젠이 박힌 내 발자국을 깊게 꽂고 싶었다. 호기롭게 여행사들을 검색해 하나씩 찾아갔다. 첫 번째 여행사는 실패. 한두 시간짜리 간단한 트레킹만 간단다. 그 정도는 전문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갈 수 있는 코스다. 가격이 궁금해 얼마인지 물어봤더니 50달러라고 한다. 두 번째 여행사로 들어간다. 여기는 정상까지 가는 여행 상품이 있다. 바로 여기다! 여행사 직원은 상품에 포함된 것들을 설명했고 내 일정, 산행 경험 등을 물어봤다. 아침에 출발해 산장까지 등산하고 쉬다가 새벽 12시에 출발할 거야. 해가 있을 때 올라가면 햇빛 때문에 눈이 녹아서 위험해. 6시쯤 정상에 도착하면 일출을 보고 내려올 거야. 장비는 우리가 다 빌려줄게. 전문 가이드 한 명과 너희 팀원이 한 몸이 되어 올라갈 거야(정말로 모든 이의 몸에 체인을 걸어 한 몸이 된다). 근데 너 고산 경험은 있어? 물론이지, 나 69호수에서도 고산병 하나 없었는데? 너도 거기 알지? 오케이… 근데 너 혼자야? 응. 혼자면 얼만데? 550달러.



   당시 환율로 550달러는 약 70만 원이었고, 막 세계여행을 시작한 내게 70만 원은 너무 큰 돈이었다. 지금까지 70만 원을 일시불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미국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 표도 40만 원에 결제했고, 550달러는 1박 2일에 태우기 너무 큰 돈이었다. 아 그래…? 혹시 일행 데리고 오면 싸게 해줘? 물론. 일단 데리고 와봐.



   숙소에 마침 같은 방을 쓰는 한국인 소정이 있었다. 소정은 그곳에서 항상 영상 편집과 그녀가 출연하는 TV 프로그램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사를 돌아보고 왔다는 걸 아는 소정은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내가 다시 물었다. 소정님, 저랑 등산 가실래요? 어유, 말도 안 되는… 전 운동과 거리가 너무 멀어요. 특별히 기대하진 않았지만 실패하니 막막해졌다. 어떻게 일행을 구하지? 페이스북에 남미 여행자 그룹을 찾아 외국인들을 꼬셔야 하나? 활동적인 여행을 좋아하는 유럽 여행객이라면 분명 한 명쯤은 걸려들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찾아보려니 최근까지 활발하게 돌아가는 그룹은 없었고, 키토에 몇 달 동안 머무르며 기다릴 수 없는 나는 결국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 여행사를 방문했다. 저기… 같이 갈 친구는 없고 550달러는 너무 비싸. 혹시 조금만 싸게 해줄 수는 없어?


저기… 같이 갈 친구는 없고 550달러는 너무 비싸. 혹시 조금만 싸게 해줄 수는 없어?



   다른 여행사를 방문했다. 들어가자마자 산맥 지도가 크게 걸려 있었다. 여기는 등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여행사 느낌이 났다. 그들이 제공하는 장비는 왠지 더 좋을 것 같았다. 설명은 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했고, 가격을 물어보자 똑같이 550달러를 불렀다. 어쩌면 이 가격이 정찰제인 걸 수도 있겠다. 가격이 같은 이상 흥정을 시도해도 여기도 결국 똑같겠지. 성과 없이 여행사 거리를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사장님께 이야기했다. 사장님은 한국인이셨고, 에콰도르의 웬만한 산은 모두 올라가 본 경험이 있는 전문가셨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니 사장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상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그런데, 일단 정말 위험해요. 이미 아시겠지만, 어두운 새벽에 출발해야 하고, 그러면 얼마나 춥겠어요? 잠이라도 제대로 자고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쉬고 출발하는 건데. 69호수가 문제없으셨다고 해도 여긴 달라요. 5,000m 넘어가면 온통 눈이거든요. 거기(69호수)는 그렇진 않은 걸로 아는데. 그것도 날씨가 좋아야 정상까지 갈 수 있지, 조금만 안 좋으면 못 가요. 포기해야 해요. 무엇보다, 네 명이 한 몸이 되어 올라가는데, 만약 한 명이 탈진해서, 더 못 가겠어서 포기하면 전부가 내려와야 해요. 혼자만 체인을 풀 수도 없으니까. 날씨가 안 좋아서든, 누군가 포기해서든, 못 올라가면 그대로 끝이에요. 550달러가 그대로 날아가는 거죠. 그래도 도전하고 싶으시면 말리지는 않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50달러짜리 간단한 트레킹을 하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 정도만 해도 특별한 경험이니까요.”

   경험자 앞에서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을 들었다. 당연히 여행사에서 실패의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릿속에는 여러 단어가 빠르게 진동한다. 550달러, 날씨, 추위, 눈사태, 탈진, 포기, 550달러, 날씨, 추위, 눈사태, 탈진, 포기, 550달러… 한국 돈으로 70만 원…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제일 거대한 건 550달러다. 물론 당시는 세계여행 초기라서 천만 단위의 잔고가 있었다. 언제 어떻게 여행이 끝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꿈을 위해 70만 원 정도는 쓸 수도 있었다. 550달러, 날씨, 추위, 눈사태, 탈진, 포기, 550달러… 누군가 속삭인다. 재우야, 70만 원이면 일주일은 더 여행할 수 있어. 그 돈이면 네가 원할 때 5성급 호텔에서 황제 여행을 할 수도 있어. 비행기도 편하게 직항 탈 수 있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어… 다른 누군가 끼어든다. 70만 원, 그거 한국에서 일주일 일하면 벌 수 있어. 지금 70만 원 쓴다고 남은 여행 동안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고, 여행 끝나고도 가난해지는 거 아니야. 그건 그냥 네 곁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같은 돈일 뿐이야. 이미 그런 거 잘 알잖아? 겨우 그깟 돈에 꿈을 팔지 마. 너 여기 왜 왔어? 잠이 오지 않아 햄버거 세트를 배달 주문하고 로비에 나왔다. 소정은 아직도 일하고 있었다.

   “소정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어렵네요. 실패 가능성이 없고 단지 돈만 많이 드는 거라면 저는 무조건 하거든요. 남미 오기 전에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300만 원짜리 사파리 투어를 갔어요. 국립공원 내부에 호텔이 있는데 거기가 1박에 90만 원이에요. 그게 포함된 거죠. 물론 저한테도 큰돈이었어요. 그래도 제 영상 보셔서 아시겠지만, 가자마자 ‘이건 꼭 해야 한다고’ 말했죠. 투어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돈을 쓴 걸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 경험으로 저는 유일해지거든요. 나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들… 그게 재우씨의 꿈이라면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죠. 근데 하, 실패할 수도 있다니 참… 제 돈 나가는 게 아니니 함부로 말씀 못 드리겠어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좋은 결정 내리길 바랄게요.”

   소정은 일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더블치즈버거를 씹으며 고민을 이어갔다. 550달러, 날씨, 추위,눈사태, 탈진, 포기… 세렝게티, 꿈, 이야기, 유일한… 지금 먹고 있는 햄버거 세트는 배달비 포함 6달러였다.


그 돈을 쓴 걸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 경험으로 저는 유일해지거든요.



   다음 날, 나는 새 여행사를 방문했다. 그곳은 구시가지에 있는 곳으로 숙소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걷는 동안 고민을 이어가다 결정을 내렸다. 자리에 앉아 말했다.

   “코토팍시 당일 투어 프로그램 있어? 50달러짜리.”

   난 돈 앞에서 졌다. 극한의 추위와 눈사태의 공포와 탈진보다 더 무서운 건 550달러였다. 단기간에 생긴 꿈은 단기간에 무너졌다.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물대포다. 지구 어느 곳보다 뜨거울 화산 위에 내리는 차가운 눈, 그리고 달러 지폐는 내 모래성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난 그렇게 550달러 대신 50달러만 내고 더 짧은 투어에 참가했다. 그 투어가 기대 이하였던 건 전혀 아니었다. 투어 날은 눈 오는 날이었고, 우리는 눈을 맞고 수없이 미끄러지며 해발 5,100m에 있는, 적도에 위치한 빙하를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졌다. 이 또한 나를 유일하게 만들어주는 경험일 것이다. 하산길에 방문한 산장에서 마신 코카차(코카인의 재료인 코카잎으로 만든 차), 산악자전거로 눈으로 축축해진 흙길을 내려오는 스릴감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든 이야기다. 눈이 와서 산의 정상은 볼 수 없었다. 눈구름은 꿈을 포기한 나를 위로해주기 위한 포옹이었을까? 아니면 돈에 꿈을 팔아치운 나를 벌하는 먹구름이었을까? 나는 눈 덮인 코토팍시의 정상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았고, 나중에 사진으로 봤지만 여전히 그걸 알지 못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70만 원이 더 있다고 내 삶이 더 풍족해질 건 아니었고, 만약 70만 원을 써버렸다고 해도 내가 햄버거 세트 하나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해지지도 않았다. 내 잔고는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물건이고 없다가도 가장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귀국 후 봤던 넷플릭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야. 살면서 다시 에콰도르에 갈 수 있을까? 키토에 다시 가서 그때와 같은 체력으로 여행할 수 있을까? 늘어가는 나이와 부족해지는 체력은 현실이다. 갈라파고스 제도(Islas Galápagos)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기는 다시 오지 못하겠다. 나중에 더 부족해진 체력으로는 여기를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느꼈다. 그렇지만 갈라파고스에 간 걸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내 꿈이었고, 달러 잡아먹는 흡혈귀에 물려가면서도 나는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었고, 바다사자의 인사도 받았고, 거북이와 함께 수영했다. 그때 내 머리는 어리석었지만 가슴은 용감했다. 갈라파고스에서 돌아온 지 고작 열흘 후, 난 다른 꿈을 팔았다. 그 행위는 용감하지도 않았고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무지했을 뿐이다. 얼마나 두고두고 후회할지. 미지의 세계를 스스로 닫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550달러, 날씨, 추위,눈사태, 탈진, 포기… 세렝게티, 꿈, 이야기, 유일한…



   한국에 있으면서 차가 없어도 지방에 있는 산까지 전세버스를 제공하는 상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항상 지방에 가고 싶은 산이 있어도 교통편 때문에 일부 몇 곳을 제외하고는 다 꿈으로만 여겨왔는데, 방법이 생긴 것이다. 월별 일정과 가격을 둘러봤다. 따뜻한 남쪽에 있는 산들은 거리가 멀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출발하는 만큼 가격이 생각보단 비쌌다. 그중에는 내 카카오맵에 저장된 곳도 있었다. 다시 고민한다. 다음 월급 들어올 때까지 이 주일… 현재 잔고 XX만원… 이거 사고 화장품도 사고 피부과도 가고 치과도 가고… 돈 나가는 일은 왜 이리 많아? 그냥 전철비만 드는 북한산이나 갈까… 일하는 내내 고민. 그러나 나는 6만 원을 결제한다. 550달러보다는 훨씬 적은 푼돈이지만 그 순간 꿈을 팔았던 키토에서의 고민하던 밤이 옅어져 간다. 14시간의 시차와 일 년의 간극은 메워지고 나는 용감해지고 우뚝 선다. 밤 12시 사당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그걸 아는 것처럼 정체 없이 달려간다. 소정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그걸로 저는 유일해지거든요…


   그깟 돈에 꿈을 파는 건, 우리에게 평생 미안해야 할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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