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그곳
금요일 밤늦게 출발하는 버스로 산청에 왔다.
산청은 한자로 山淸이라고 쓴다. '맑은 산'이라는 뜻인데 아마 우리나라의 지역 이름 중 가장 깨끗하고 예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울에서 느끼는 구역감, 오해, 가해,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싸움도 이곳에선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할 것 같다.
이곳에선 어떤 상처도 주고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과학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고도가 높아지며 눈이 두꺼워지는 걸 보면 낯선 마음이 든다.
분명 내가 사는 세상이지만, 너무 멀리 떨어진 아득한 어느 지점.
나무에 걸린 눈은 점점 무거워지고 인간의 흔적은 그 속에서 희미해지다 사라진다.
뽀드득 소리만 내 감각을 지배한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희다.
마침내 온 세상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하얀 눈은 모든 걸 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은 서로의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눈은 그걸 전혀 가리지 못했다.
두 남자가 참 저급하게 싸우고 있다.
사진 찍느라 길을 막자 이런 거 처음 보냐고 자부심을 부리다 서로 싸움이 붙었다.
좋은 곳에서 나쁜 언어와 욕을 주고받는 그들에게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역할 분담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억울하면서도 뻔뻔하다.
그들은 흰 세상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 등산하는 편이다.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속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걸 신경 쓰면 내 속도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면 불안해진다.
결국 그들에게 따라잡힐 것만 같고 앞서나간 그들의 뒷모습은 날 비웃는다.
그 뒷모습이 보기 싫어 뒤에 누군가 오고 있으면 먼저 그들을 보내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감는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토요일임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바람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리산에서 나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게 주어진 세상은 하얗고, 차갑고, 외로웠다.
그건 내가 희망했던 것이기도 하다.
나를 절대 해치지 않을 품, 내 존재의 티조차 나지 않는 이곳.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거리였다.
나도 널 추월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내게 다가오지 마
지리산의 대피소에선 취사가 가능하다.
사람들은 모두 라면과 전투식량을 가져와 먹고 있었고, 고기를 굽는 분들도 있었다.
나는 산에서 먹는 음식에 관심이 없어 서울에서 사 온 김밥과 붕어빵을 구석에서 먹었다.
김밥과 붕어빵은 꽁꽁 얼어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단무지의 시큼한 맛만 입안에 맴돌았다.
옆에서 고기를 올리길래 블로그에 올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지 요청하니 흔쾌히 수락했고, 고기도 몇 점 주셨다.
"아니 이걸 제가 어떻게… 세 점은 많고 두 점만 먹을게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위에는 진짜 추워요."
세계여행을 하면서 느낀 한국과 외국의 가장 큰 차이는 '인사'다.
물론 외국이라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다짜고짜 인사를 하진 않는데, 한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뒤지도록 인사하지 않는다.
산에서는 가끔 먼저 '안녕하세요'를 건네는 분들이 계신데, 상당수는 그걸 무시한다.
뭐야? 날 알아? 왜 굳이 인사해?
어느 날 나도 인사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의 뜻은 그 사람의 안녕을 빈다는 뜻이다.
그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안전산행하세요'
'여기에 모든 걸 비우고 가세요'
'보이는 모든 걸 놓치지 마세요'
반대 방향에서 오는 아저씨랑 몇 마디 나눴다.
"거림에서 오시는 거죠? 오늘 이쪽에서 많이 오시던데."
"아, 오늘 어디 산악회에서 버스 타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많은가 봐요."
"역시… 혹시 이쪽 방향으로 가는 사람 봤어요?"
"아뇨,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천왕봉에 지금 바람 정말 많이 불고 미끄러워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조심히 가세요."
"네, 고마워요. 선생님도 조심히 내려가세요."
문득 천왕봉에 가지 않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할 수 없는 지리산이고, 모두가 서로의 도우미이자 동료이자 친구이자 은인이었다.
여러 얼굴을 지녀도 용인되는 넓고 깊은 품이었다.
모든 흔적이 눈에 파묻히는 고결한 얼굴이었다.
날씨마저도 추웠던,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억울함, 뻔뻔함, 죄책감, 구역감, 피해와 가해는 새하얀 겨울 속에서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지리산은 서울과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