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도시에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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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뒤지게 털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 중에 어느 것이 행복을 좌우할까?
어렸을 때부터 '첫인상이 중요하다'라는 말만 믿고 시작이 제일 중요한 줄 알았는데,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처음만큼이나 중요한 게 끝 모습, 마무리임을 깨달았고,
출근길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내 경험보다 옛말이 더 우월하다는 걸 가시 박힌 말을 통해 다시 느낀다.
대림역에서 잠실역까지는 평시에 40분 걸린다.
직선거리로도 18km가 넘는 두 곳을 단 40분 만에 이어주는 지하철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렇다면 8시에 탑승하면 아무리 늦어도 8시 50분에는 도착하겠지?
8시에 탑승하는 이들은 이게 틀렸음을 잘 안다.
8시에 탑승하면 9시에 도착한다.
그러면 10분 더 일찍 나오면 되겠지?
7시 50분에 타면 8시 55분에 도착한다.
그럼 7시 40분에 타면? 7시 30분에 타면?
이러나 저러나 삶은 팩팩하다.
힘겹게 몸을 열차에 끼우자마자 힘 빠지게 만드는 기관사의 육성.
승객이 매우 많아 앞 열차가 출발하지 못해 잠시 정차할 수도 있습니다.
좁은 간격으로 열차가 운행되고 있어 열차가 서행하고 있습니다.
열차는 버스와 다름없는 속도로 달리고 각 역마다 2분씩 정차한다.
2분이나 문이 열려 있으니 사람들은 어떻게든 몸을 비집어넣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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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바로 앞에 기대고 있는 남자가 있다.
몇 명이 내리려고 하자 그는 잠시 열차를 빠져나와 문 바로 앞에서 그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세 명 정도가 나가고 약간의 공간이 서로에게 생겼다.
남자는 다시 열차에 타려고 했지만 그를 위한 공간은 없다.
남자는 당황하기보단 황당해하며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열차는 그대로 문을 닫고 출발했고, 내게는 아주 조그만 숨통이 트였다.
몇 시에 출발해도 매일같이 똥줄 태우며 이동하면 어떻게든 타보려고 육탄전을 벌이는 이들이 미워진다.
그러다가 벌써 얼굴도 잊은 그 남자에게 미안해진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아침 8시에 짓는 서울의 얼굴은 억울하면서도 뻔뻔하다.
표정의 부조화는 하루의 시작을 메스껍게 만든다.
13층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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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은 동생의 생일이다.
일 년에 한 손에 꼽을 외식을 하러 밖을 나서는 길이 어둡고 춥다.
내 기억에 매년 12월 18일은 추웠다.
동생이 태어났던 그해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을까?
그날도 오늘처럼 어둡다라는 말보다 더 어두웠을까?
그날도 오늘처럼 나무는 가볍고 공기는 회색의 무언가도 없이 깨끗했을까?
그날도 사람들은 원치 않는 피해를 주고받았을까?
그날도 사람들은 구토했을까?
거리는 바람에 날릴 낙엽도 없이 깔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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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 7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 뾰족한 창은 해가 떠 있는 내내 보이지 않는다.
퇴근하고 다시 7번 출구로 가는 길에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면 예쁜 건물 외벽의 조명도 가까이서 보면 슬프고 흉하다.
문득 올해가 가기 전에 지리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절대 해치지 않을 그곳에.
내가 어떠한 흠집이라도 낼 수 없는 그곳에.
속도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그곳에.
내 존재, 그리고 모두가 티조차 날 수 없는 그곳에.
가장 어두웠다가 가장 밝아지는 그곳에.
가장 순결한 그곳에.
여러 얼굴을 지녀도 용인되는 그곳에.
그곳에 간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추운 날이어야 한다.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