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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철 Apr 28. 2022

되는 제안서는 무엇이 다른가?

퇴사를 일주일 앞두고 가장 힘을 쏟았던 일은 회사에 들어온 용역 업체들의 제안서를 꼼꼼하게 훑어보는 것이었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나가면 그때는 ‘되는 제안서들은 돈을 주고 사서 봐야’하므로, 볼 수 있을 때 많이 공부를 해 놔야 하는 것이었다. 마침 홍보부서에서 회사 SNS를 통째로 제작·운영할 용역 입찰에 들어간다기에 굳이 안내를 맡겠다고 자처하였다. 업체들이 써오는 정성제안서(발주처가 요청한 사업에 대한 이해와 분석, 수행 전략, 세부 시행 계획, 제안사 특장점 등이 포함된 문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업체는 어떻게 PT를 하는지, 기술제안서 평가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심사위원들은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지점에 높은 점수를 주는지 등이 내 주요 관심사였다. 이것은 회사에서의 내 마지막 공부가 될 터였다.      


제안서 평가가 있던 날, 나는 업체 대기실과 면접실을 오가며 안내를 하는 틈틈이 바깥에서 면접실 벽에 귀를 대고 업체 PT를 들었다.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은 물론, 업체 측의 반응도 체크하면서 느낀 점들을 메모하였다.    

 

안 되는 제안서는 이것이 달랐다!     


하나, 발주처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

이런 제안서들의 특징은 오타가 많다는 것인데, 일반 오타는 물론 심지어 발주처 이름을 잘못 기재해 오는 경우도 더러 있어 제안서만 봐도 PT를 어떻게 할지가 짐작되었다. 반대로 되는 제안서들은 우리 업계에서만 쓰는 용어들을 자료에 넣고, PT 때도 ‘무심하게(?)’ 언급하여 발주처에 대해 상당한 이해도가 있다고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었다.  


둘, 두루뭉술한 기획과 전략

제안서에는 사업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가 들어있어야 하는데, 안 되는 제안서에는 기한도, 기획도, 전략도 두루뭉술한 경우가 많았다. 한 제안서에서 보았던 문장을 예를 들면 ‘재미있으면서도 전문적이고 파격적이면서도 너무 튀지 않은 영상을 제작할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문장을 봐서는 대체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제작할 것인지 도통 알아차릴 수가 없다. 되는 제안서에는 구체적인 수행 시기와 방식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발주처에서 기존에 제작한 콘텐츠 하나를 들어 직접 시나리오를 재구성하여 보여준다든가, 제안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샘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식이었다. 제안사가 보유하고 있는 방송 장비와 아나운서 및 인플루언서 등을 활용하여 만든 샘플을 보여주면 열 마디 PT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셋, 예산을 넘어서는 실행 계획

콘텐츠 제작을 하겠다고 입찰에 응한 업체들 대다수가 인플루언서들과의 협업안을 꺼내는데, 이때 발주처가 제시한 금액에 견주어 타당한 안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셀럽들을 모시고 촬영할 정도의 예산이 못 되는데, 사업을 따고 싶다고 무조건 다 할 수 있다고 해서는 곤란하다. 콘텐츠 제작을 하면서 사용하게 될 영화나 드라마, 타기관의 이미지 사용에 지불하게 될 저작권료도 고민해야 한다.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발표 때는 인플루언서 누구누구도 섭외할 수 있고, 무슨무슨 영화를 써서 제작할 거라고 했는데, 정작 본 사업 때는 예산이 없어서 못 한다고 업체가 퍼져버리는 일도 더러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지점을 매우 날카롭게 간파하고 질문한다.     


넷, 분량 배분 실패

유독 기억에 남는 탈락한 업체의 제안서가 있는데, 그 제안서는 전체 50장 중 30장을 제안사 소개에 할애하고 있었다. 보통은 사업 목적과 기간, 과업 범위를 주지하고, 제안 추진 전략을 소개하는 순으로 제안서 기술이나 PT가 진행되는데, 그 업체는 준비한 문서의 5분의 3이 제안사 이력이었다. PT 때에도 업체 소개에 상당 시간을 보내 정작 사업에 대한 얘기는 충분히 못하였다. 답답해진 심사위원이 콘텐츠를 어떤 식으로 제작할 것이냐 물으니 제안사 측에서 음악 콘텐츠에 자신 있다며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답은 없겠지만 PPT 자료는 30장 내외면 충분하다. 여기에서 가장 공들여야 할 부분은 사업에 대한 분석과 기획, 세부 실행 계획, 사업 관리에 대한 측면이다.     

 

마지막으로 제안서 평가에서 뜻밖의 감동적인 지점이 있었는데, 업체가 회사의 로고 색감에 맞추어 도표와 PPT 디자인을 한 것이었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는데, 회사 로고의 색을 이용하여 자료를 구성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하였다.

     

결국 발주처와 발주처의 사업, 그리고 업체가 가진 본 역량에 대하여 얼마나 깊게 고민하였는지가 승패를 좌우한다. 회사 밖에 나가서 살아남고 아니고 또한 내 업과 스스로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결정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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