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황혼>(오즈 야스지로, 1957)
오즈 야스지로의 1957년 영화 <동경의 황혼>은 그의 마지막 흑백 영화로 불완전한 가족을 다룬다. '가족 해체 이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해당 작품은 부부, 부녀, 자매, 연인 등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기쿠코가 남편과 두 딸을 남겨두고 연인과 가출하는 것, 남편과 별거 중인 타카코, 임신한 아키코가 소통하지 못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는 지금까지의 오즈 영화와는 달리 유기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또한 그 안에서 아키코의 죽음은 늘 예견된다. 한편, 영화 속 여성은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영화에 복무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따라 이 글은 영화의 편집을 중심으로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관해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아키코가 진료를 받는 숏, 아키코가 수술실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가는 숏, 집에 돌아온 아키코가 현관문에 주저앉는 숏, 놀고 있는 미치코(조카), 다시 아키코, 다시 미치코로 진행되는 장면을 상기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임신 중절 수술을 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는) 빈 공간 뒤로 이어지는 숏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 해보자. 아키코와 미치코를 교차해 두 번 반복한다. 특히 다시 반복해 미치코를 보여줄 때, 미치코는 앞을 행해 걸어와 프레임을 채운다. 이는 아키코가 미치코를 바라보는 숏 다음에 등장해 미치코의 시점숏이라 할 수 있는데, 방금 막 임신 중절 수술을 끝내고 온(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아키코의 입장에서 봤을 때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미치코의 전진을 아키코의 시점숏으로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이를 임신 중절 수술 뒤에 배치하는 것, 이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후 아키코는 싫다며 얼굴을 가린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미치코가 아키코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영화는 임신 중절을 선택한 아키코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 것 같다. 또한 처벌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고통을 안겨주며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켄을 때리는 아키코와 사고 당하는 아키코로 도식화했을 때 분명해진다. 켄을 찾아 다니던 아키코는 칭칭켄에서 켄을 만난다. 아키코는 켄을 보자마자 뺨을 몇 대 때리고 그곳을 빠져 나간다. 그 후 아키코는 기차에 치이고, 병원에 입원한다. 임신 사실을 알리자 곤란하다거나, 진짜 자신의 애가 맞는지 묻는 켄을 하염없이 찾아다니던 아키코가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켄을 때리고 밖으로 나간 아키코가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하는, 그렇게 배치한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에 대한 인물들의 평가를 살펴보자. 칭칭켄 주인은 따라오지 않는 켄이 나쁘다고 말할 뿐이고, 아버지와 타카코는 왜 다쳤는지를 떠나 그 시간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 아키코는 살고 싶다고 말한다. 아키코는 살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연결을 단순히 오즈 스타일, 즉 파편화된 서사, 맥락의 제거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켄은 아키코를 찾아왔고, 아직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갑작스레 아키코는 폭력을 행사하고 사고를 당한다. 폭력을 행사했기에 사고를 당한다고 바꿔말해본다면 어떨까.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아키코를 처벌하듯 다루고 있는 것은 영화의 연결, 배치로부터 기인한다. 죽음의 기로에 놓인 순간 살고 싶어 하는 아키코의 생의 의지, 죽음의 순간 다시 시작하려는 순환의 이미지로 보기에는 다음의 질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켄을 때리는 장면 뒤로 아키코가 사고를 당하는 것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아키코의 사고, 그리고 죽음은 그저 폭력을 휘둘렀기에 처벌 받아야 하는 여성으로 비춰질 뿐이다.
그래서인지 아키코와 그의 죽음은 하나의 유희거리로만 느껴지기도 한다. gerbera (데이지) 바에서 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아키코는 해당 장소를 빠져 나간다. 그 후 바 직원과 손님은 아키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손님이 아키코를 "예쁘다"고 평가하자 바 직원은 "불량소녀야."라고 낙인찍듯 말한다. 이러한 평가는 영화 내내 아키코의 지인들의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아키코의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이후로 등장하는 숏은 마치 안경점 홍보 간판, 그리고 건널목 안전바이다. 간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두 눈은 마치 아키코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것들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키코는 마작 가게에 모여 게임하는 사람들 입에 주로 오르내린다. 게임 이야기와 일정한 규칙 없이 뒤섞이는 아키코의 이야기는 쉽고 가볍게 발화되고 전달된다. 이로써 등장하는 아키코의 지인들이 그를 한낱 유희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후 위험하다는 안내문이 붙은 건널목의 안전바가 등장하고 아키코는 칭칭켄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키코는 켄과의 만남 후 사고를 당한다. 이러한 연결로 유추해보건대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이 아키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로써 영화는 하나의 도덕적 가치를 교훈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같은 장소를 똑같은 구도로 찍은 기차 장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기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고 있고, 두 번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떠나고 있다. 처음 장면 뒤로 기쿠코를 찾아간 타카코가 아키코에게는 엄마라고 말하지 말라는 장면이 이어지고, 두 번째 장면 뒤로는 타카코가 기쿠코에게 아키코의 죽음을 알리며 그를 탓하는 장면이 붙는다. 기차가 오고 가는 것을 순환으로 본다면 이러한 배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영화는 가족의 해체 원인이 되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기차 장면 뒤로 따라 붙으며 영화의 순환 구조를 여닫는다. 타카코와 기쿠코의 만남, 밝혀지는 가족 해체 이유, 그러면서 아키코는 죽고, 기쿠코는 떠나고, 타카코는 불행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는 영화,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임신 중절을 택하고 그 원인이 되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키코는 사라져야 하고, 가족의 해체의 원인이 되는 기쿠코는 떠나야 하며, 이러한 것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가족의 해체를 다시 메꾸려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이다.
오즈의 영화를 우리는 흔히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 말한다. 죽음과 같은 특권적 순간들을 벗어나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가족 해체의 원인인 기쿠코는 동경을 떠나야 하고, 타카코는 불행하지만 딸 미치코의 행복을 위해 불행했던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말해, <동경의 황혼>을 가족 해체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보여주면서,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여성이 지녀야 할 도덕성을 제시하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