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사물 그림으로 시작된, 나름 심오한 그림 인생
‘무엇으로 무얼 그릴까? 크레파스로 의자를 그려 볼까? 수채화 물감으로 구두를 그릴까?’
5년 전 가을, 나는 뜬금없이 이런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갑작스레 <그림책 작가 되기> 강좌에 등록하면서 생겨난 고민이었다. 첫 번째 과제가 ‘미니 사물 그림책’ 만들기였는데,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주변의 사물부터 그려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림 도구라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둘러 스케치북과 도화지, 크레파스와 수채화 물감, 색연필, 색싸인펜, 미술 연필부터 구입했다. 그러고는 고민 일주일 만에 내 주변의 사물들을 본 대로,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쓱쓱 싹싹 그려냈다. 찻잔과 커피포트, 노트북과 블루투스 스피커, 그림 물통과 연필깎이, 색연필 케이스와 그림 붓, 의자와 칫솔과 박카스 병, 물뿌리개와 포크와 구두를…….
참으로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렇게도 두려웠던 그림이, 그리려고 마음먹고 그렸더니 어떻게든 그려졌기 때문이다. 여고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린 이후 무려 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림은 - 정확히 표현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나의 평생 로망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항상, 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눈으로 보는 것, 상상하는 것, 꿈꾸는 것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축에 속했다. 미술 과목 실기 점수가 늘 형편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초·중·고교 시절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물감 묻은 미술 앞치마를 두른 채 캠퍼스를 활보하는 ‘미대 언니’들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내가 그림을 못 그리니까 ‘미대 오빠’와 연애라도 해서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간접적으로나마 풀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야속하게도 나를 미대 오빠와 맺어 주지 않았다.
결혼을 한 후 신문기자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이후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어서도 나는 항상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그리고 싶었다. 그림은 나의 가슴 한 구석에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오도카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면 그냥 그렸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선뜻 실천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 한편에 ‘나는 원래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 ‘내게 그림은 사치’라는 자조적 생각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여고 시절의 절친은 천재적인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 아이였다. 교내는 물론이고 교외 미술대회의 상이랑 상은 다 휩쓸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으니 나의 그림은 더더욱 초라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엔 그림 서클에 가입했다가도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한테 기가 죽어 금세 탈퇴했다. 신문기자 시절에는 직장 생활과 육아만으로도 허덕거렸기에 그림을 그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된 후에도 나는 그림에 대한 동경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 문화센터는 물론이고 예술의전당이나 대학 부설 미술교육원 같은, 전문 미술 교육 강좌에 여러 차례 등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강일에 임박해서는 번번이 등록 취소를 되풀이하곤 했다.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 그림은 무슨……’, ‘글이나 제대로 쓰자.’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 전업 작가 19년 차가 됐을 때쯤 우연히 <그림책 작가 되기> 강좌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번만큼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고 시절 이후 그림을 한 번도 그려 보지 않았음에도 덜컥 수강 신청을 한 것이었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을 함께 해야 하니까 설사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글로 조금은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에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처음엔 내가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 지 영 자신이 없었다. 나처럼 수십 년 동안 그림을 안 그려 본 수강생은 없는 것 같아 살짝 주눅도 들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 보기로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그 결과 첫 과제로, 내 주변의 사물들을 그려 마침내(!) 미니 사물 그림책
『쓱쓱 싹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전엔 그저 한낱 사물이었을 뿐인 그것들 즉, 찻잔과 커피포트, 노트북과 블루투스 스피커, 그림 물통과 연필깎이, 색연필 케이스와 그림 붓, 의자와 칫솔과 박카스 병, 물뿌리개와 포크와 구두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평생의 로망이었던, 사소하지만 나름 심오한 ‘그림 인생’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동안에도 공백기는 있었다.) 여전히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그리지 않느냐고 그야말로 '자화자찬'하면서.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사소하지만 심오한 그림의 날들』은 내가 그동안 그려 온, 그리고 앞으로 그려 나갈 '그림 인생'의, 사소하지만 꽤 심오한 기록이 될 것이다.
*덧 : 5년 전 내가 서울시 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수강한 <그림책 작가 되기> 강좌는 그림책 작가이자 라이브 페인팅의 대가인 김중석 작가님이 진행했다. 그림에 관한 한 완전 초짜배기였던 나는 이 강좌에서 '그림 그리기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