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번의 교류분석(TA)
요즘 다시 "로맨스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정주행중이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싸우려고 이 세상에 내던져진걸까요?" 학생 때는 학업으로 경쟁하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싸우고, 연애해서는 상대와 싸우고. 이럴거면 싸우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던지.
나 또한 남편과 다툼이 있었다. 서막은 이랬다. 모두에게 딥한 블루를 안겨주는 코로나19는 나에게 또한 그랬다. 나는 울적한 기분이 들면,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무언가를 바꾼다. 머리 스타일이라던지, 집에 작은 인테리어던지. 나에게 이 신선한 것이라도 보아라, 내던져주는 위로라 할까.
그래서 나는 금방 올 가을을 위해 옆머리를 직접 잘라보기로 했다. 가위와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을 향한다. 이미 여러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정신을 단련했다. "이렇게, 아 저렇게" 마음 속으로 단련한 것을 난 충분히 시연해낼 수 있으리라. 하라는 대로 각을 잡아 앞머리를 움켜 쥐고, 엄지 손톱 모양대로 가위질을 해본다.
쓰삭- 쓰삭,
소리부터가 기분이 좋아진다. 좋았어, 예감이 좋아. 나름 만족한 앞머리를 샤워 후 야무지게 말려본다. 쓰지 않아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헤어롤로 말아 드라이기로 따뜻한 바람을 쐬어준다. 거울을 보며 만지작 거리니 나름 괜찮다. 작은 변화이지만 분명 기분이 나아지니 참 신기하다. 남편에게 물어본다.
"앞머리 잘랐어, 어때?"
아, 여기서 시작이었다. 물어보면 안됐었다.
사실 여기서 남편의 의견은 필요 없었다. 나 나름대로 기분을 내보았으니 칭찬만 해주면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내 야무지 꿈이었나보다. "음-" 3초간 나를 보던 남편을 보며 대답이 더딘 이 침묵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가 됐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될터인데. 너는 그 대답 하나 어렵니. "음- "하면서 이제는 가까이 다가온다. 이미 시간은 끝났다. "괜찮네" 한 마디 해주면 될 것을 친히 다가와 판단해주려는 너의 수고 받고 싶지 않다. 결국 "그거 한마디 못해주니", 날카롭게 신경질이 나버린다.
남편은 어디를 잘랐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잘 보고 싶어 가까이 가면서까지 이야기 해주려고 했단다. 난 그런 판단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명료하고 정확하여 무릎을 탁 치고 "그랬구나!"라고 느낄 만큼의 해결답안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신이 나기 시작한 내 마음에 동참해주라. 공감을 원했던 나. 해결을 해주고 싶은 남편. 그렇게 서로는 너무 달랐다.
엄마가 처음 나에게 월경에 대해 가르쳐 준 적이 떠오른다. 갑작스레 방에서 생리대를 착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엄마가 당시에는 당황스러웠다. 지금은 엄마가 어디선가 어떤 얘기를 들었구나 짐작한다. 학교에서 갑자기 월경이 시작된 친구의 딸 이야기라던지, 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라던지. 그렇게 하나씩 가르쳐준 엄마에게서 나는 월경이 왜 생기는 것인지, 무슨 의미인지 들을 수는 없었다. 월경이 시작되고 나서도 비슷했다. 남동생이 휴화장실 휴지통에서 피를 본 것 같다고, 누구 코피 났냐는 말을 한 후부터 나는 엄마에게 다시 잘 처리하는 방법을 들어야 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난 엄마가 미웠다. 왜 미운지 모르게 미웠다. 더 솔직히 말하면 억울했다. 그냥 혼나는 느낌이랄까. 내가 코피가 났었고 그 흔적을 본 것이라 해도 나는 이렇게 혼났을까.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엄마는 여자의 월경에 대해 잘 숨기고, 잘 처리해야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잘 처리하는 방법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엄마가 서른이 넘어보니 이해가 됐다. 엄마는 그렇게 배워왔던 것이다. 그 세대에는 여자에게 부끄러움이라 여겼고, 여자의 숙명이다 여겼을 것이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은 엄마의 엄마에게 배워왔으리라 생각해본다. 불과 얼마전만 해도 처음으로 생리통, 생리대 광고에서 "생리"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그 전까지는 통용되게 '그 날'이라고 불렀다(뭔가 비밀스러운 느낌을 풍겨준다). 그리고 그런 제품명만 언급한 광고들을 보면서 그 엄마의 엄마의 딸들은 자라왔다. 당시에 나는 꼭 부르면 안되는 이름인 것만 같았다.
세대가 바뀌면서, 전 세대가 가르쳐주었던 '그것'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확장해나가고 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그 개념을 막상 터서 넓게 생각해보니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월경이 그랬다. 여자가 아이를 낳기 위해 난자를 생성하고,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 생리적 반응은 여자가 숨겨야하는 '비밀'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짠해졌다랄까. 엄마가 월경을 처음 경험했던 나이에 그 사회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와 다르게 배웠다. 그 다름을 당시에는 이해못했다. 아마 세대에서 오는 이러한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다름을 이해하는 것보다, 다름을 '다름'으로 용납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나와 다른 것이 '다름'에서 부터 출발했다라는 것을 알고 보면, 다름이 '다름'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 다름을 용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싸우게 된다. 나와 남편이 옆머리 하나가지고 다투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릭번은 교류분석 심리학을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을 확장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 원초아 그리고 이 둘을 중재하는 자아를 이야기했다면, 에릭번은 자아는 3가지로 나뉜다고 분류하였다. 어른 자아(Audult-이성적이며, 지나치면 ai와 같다), 부모 자아(Parents-부모에게 물려받으며,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과 돌보는 역할을 한다), 아이 자아(Children-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고, 논리적이지 못하며 돌봄을 받기 원한다)으로 나뉜 자아는 모든 사람이 3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나 차지하는 양상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세가지 자아는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타나고, 이 교류가 상호적이지 않을 때의 예를 들어 인간의 병리적 원인을 설명하였다. 깊게 설명하자면 라켓 감정과 스트로크를 얻기 위해 내담자가 실시하는 게임이나 교류분석의 양상이 있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삼각형 구도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양상만 살펴보자(교류분석이 궁금한 이들은 시중에 잘 설명되어 있는 책을 구경해보자). 양상만으로도 교류분석이 부모상담에서 잘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이야기하는 자아, 상대방이 이야기해주길 바라는 자아가 타인과 맞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엄마와 나에서 볼 때 나는 엄마에게 아이 자아로써 이야기했고, 엄마에게 부모자아로 설명을 듣길 바랬다. 따뜻하고 돌봄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부모자아보다는 나에게 어른자아로써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주로 설명했다고 볼 수 있다. 대게 어른 자아로 상호작용하는 이에게 타인이 똑같이 어른자아로 상호작용할 때 교류되었다고 볼 수 있다(딱딱한 분위기지만 논리와 이성을 위주로 진행되는 직장에서의 회의시간을 떠올려보자).
상담에서는 이러한 내담자가 가진 자아의 양상을 분석하고, 상호작용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격려한다. 교류분석을 배우고 나서,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서로의 화살표가 맞지 않을 때를 종종 마주치곤 한다. 그럴 때 나는(상대도 그렇겠지만) 그 다름 앞에 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교류와 타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교류가 다를 때, 틀렸다라고 상대를 꼬집을 수는 없다. 오롯이 나만이 수용되거나 타인이 수용되는 경우는 교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엄마와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우리의 대화가 달랐다고 생각한다(물론 내 억울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다름을 다름으로 이해하고 나니, 덜 억울해졌다라고 할까. 상대가 날 오롯이 이해해주길 바랬던 좁은 틈으로 바라보던 시각이 넓어졌다고 해야하나. 마음의 평수가 조금은 넓어졌다. 마음의 평수가 넓어지고 나니 억울했던 내 마음을 꼬깃 꼬깃 접어 깊숙히 넣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여유가 생겼다(물론 남편과 또 다시 다투게 될 때에는 여유고 뭐고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유를 선사해준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이 돌아보니 꽤나 오래걸렸구나 싶었다.
다름을 '다름'으로 용납하는 것. 이해하고 수용하라는 말과는 다른 일이다.
다르다는 것을 '다름'으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