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질 때면 창 밖에 풍경에 꽂혀 자주 멍을 때리는 것을 즐긴다. 말 그대로 즐겁다. 푸릇했던 여름의 잎사귀도 좋았지만, 저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기특함 마저 든다. 가을이라 '이건 합법(?)이야"라고 생각하며 따뜻한 코코아까지 옆에 있으면 삶이 한 껏 풍요로워진다.
그런데 나는 코코아를 타는 것이 좀 어렵다. 하물며 우리들의 친구 컵라면도 물을 따르는 기준선이 있는데, 어쩌다 가끔 마시는 이 코코아는 물을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코코아 겉 면에 제시해주는 '물 90ml'를 또 계량컵에 따라 맞추는 것은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한지. 눈대중으로 대충 맞춰 넣어서 휘휘 저어주면 맛이 너무 진한 듯하다. 그래서 엄마의 용량 '한 바퀴'(우리 엄마는 양념이든 물이든 한 바퀴가 단위이다)를 사용해보면 밍밍해진다.
밍밍해진 코코아를 가지고 돌아와 한입 마시면 '음? 음.. 그래 뭐' 라며 우선 애써 나를 달래지만, 두 번째 마시면 '밍밍하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진한 맛과 밍밍한 맛 중에 어떤 취향이냐고 묻는 다면, 나는 밍밍함이 낫다(정상적으로 마실 수는 없나요라고 되묻겠지만). 단순한 내 취향일까. 나는 진한 매력보다는 밍밍함이 좋아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나. 코코아 하나로 공상이 창밖까지 넘어가는 순간이다.
맞다. 남편은 나와 사귀기 전 3개월 동안, 고백도 스킨십도 없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남편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마, 기회보다(자극보다) 안정이 중요한 내 기질 탓일 것이다.
심장을 한 순간에 폭파시키는 마성의 매력이 좋기보다는 볼수록 마음이 젖어드는 매력이 좋다. 화려한 불꽃놀이를 좋아하기보다 눈을 크게 떠야 보이는 별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최신 나온 전자 기기보다 내가 다룰 줄 아는 전자 기기가 좋고, 맛깔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좋기보다 무해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본디 마음은 마음을 끌기 때문에,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밍밍한 그 마음이 나와 비슷해 동질감을 느낀달까. 한순간에 흠뻑 젖어드는 순간의 힘에는 믿음이 잘 가지 않고, 작지만 찬찬히 젖어드는 힘이 진짜 힘이라 믿는다.
이런 밍밍함을 누가 매력이라 하겠냐만은, 너무 세지도 또 너무 약하지도 않아 내가 흡수하기에 충분하다 여겨지는 만만함, 그것이 매력이다.
가끔은 자극적이고 당기는 맛에 끌릴 때도 있다. 익숙하고 언제 봐도 거기인 동네를 떠나 밤늦게까지 '나 젊은이야'라고 속으로 속삭여주는 연남동이나 이태원을 가보고 싶다. 하지만 결국 나는 지금의 창 밖 너머 고즈넉이 자리 앉은 나무들의 풍경과 그 나무들이 힘없이 떨어 뜨린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최애까지는 아니지만 먹어줄 만한 커피를 파는 카페까지 자리 잡은 지금 우리 동네가 더 좋다.
밍밍함, 그것이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