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심리학
우리 집은 화장실에서 비누를 사용한다. 코로나 19로 변한 탓인지 주변에서는 꽤나 많은 이들이 물비누를 사용했다. 편리해 보이고, 위생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듬에도 오래 써온 비누를 배신할 수 없다고 느껴진 건 변화의 흐름을 꺽지 않으리라는 자존심일까. 어쨌든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마다 물에 불려 뭉개진 비누를 마주한다. 엄마 집에서 얻어 온 비누라 값어치가 얼마나 하는지 모르지만, 마음에 들진 않는다. 비누가 있어야 할 받침대는 비누가 온몸으로 칠해놓은 비누 때로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고, 때 때마다 받침대도 물에 씻어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비누는 계속 질척거렸다. 치덕 치덕이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받침대에도 치덕 치덕 되던 비누를 만지면 내 손에 그 불어 터진 촉감이 느껴졌다. 이 치덕 치덕 하고 질척거리는 비누가 귀찮아지기 시작한 건 3개쯤이나 사용하고 나서이다. 그리고 나는 물비누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주문한 화장실용 제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의 이름은 푸푸리다(광고 노노). 푸푸리는 천연 오일로 만들어 변기 물에 한 두번 뿌려주면 오일층을 형성하여 용변의 냄새가 올라오지 않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용변을 보기 전 자주 애용했더랬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 쓰던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느꼈다. 푸푸리를 사용하기 오래 전부터 썼던 에이솝 핸드크림인데 동료 선생님이 사용하던 걸 보고, 냄새가 좋아 따라 사게 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푸푸리와 향이 매우 흡사한 것이다. 볼일 보고 나와, 깨끗이 씻은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면 기분이 상쾌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치 아직도 변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라벤더를 좋아하는 한결 같은 취향 덕에, 푸푸리도 핸드크림도 비슷한 향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자연스러웠으나 한번 웃고 넘기기에는 용변을 볼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물론 푸푸리의 라벤더 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푸푸리의 라벤더 향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인 것이다. 학습심리학에서는 이를 연합이라고 말한다.
연합은 크게 고전적 조건 형성과 조건적 조건 형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많이 들어본 파블로프의 개 실험은 고전적 조건 형성에 해당한다). 연합은 <조건+반응> 혹은 <반응+반응>으로 진행되는데, 나의 라벤더향 사건(?)은 <반응+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확히 말해, 화장실에서 맡은 라벤더 향은 용변을 보고 나서의 환경에 대한 냄새, 감정이 상기된다. 그리고 핸드크림에서 나는 라벤더 향이 화장실에서 맡은 라벤더 향과 비슷하기 때문에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화장실에서의 냄새와 감정이 불러일으켜 지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흔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환자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 몇시간 동안 갇히고 추락의 위험을 경험한 PTSD 환자에게는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장소, 덜컹거리는 느낌, 층에 도착하는 소리, 당시의 냄새 등이 연합되어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 날 수 있다.
물론 연합에는 지속성, 즉시성, 일관성 등이 따르며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이 아니기에, PTSD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로 학습된 라벤더 향은 나에게 일시적으로 행동을 조정할만큼 힘이 강했다(이 불편한 느낌이 싫어 일부러 푸푸리를 쓰지 않거나, 다른 향의 핸드크림을 구입했다).
막상 물비누를 주문하고 도착까지 했는데 아직 비누가 남아 있어 쓰질 못했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게 나는 세면대에서 비누를 마주할 때마다, 새 옷을 주문하고 막상 입고 나갈 시간이나 장소가 마땅치 않아 장롱에 고이 모셔둔 채 '그 날'만 기다리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이제 곧 작별한 비누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미래에 질척거렸는데 싶었다. 나는 내 미래에 치덕 치덕 걱정을 붙였다. 옛날에 쓰던 찰흙(나이가 드러나는 대목이구나)은 아이클레이와 다르게 손에 치덕치덕 묻어서, 한번 만지면 손을 다른 용도로 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찰흙만큼이다 치덕스럽도록 미래에 걱정을 붙였기에, 비누를 보면 그런 내 모습이 떠올라 걱정스러웠다. 라벤더 향 사건과 같은 연합의 효과가 비누를 보면서도 일어난 것이다. 비누를 보며 치덕거리던 나의 모습을 떠올렸고, 반복해서 비누를 사용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지'하고 생각을 생각했다. 이쯤 곱씹으니 비누가 보기 싫어졌다. 비누의 학습효과는 아껴쓰고, 나눠쓰고 다시 쓰던 나를 바꿔놓았다. 미래와 불안에 질척거리던 나를 청산하고 싶은 마음에 불쑥 오늘 아침, 비누를 변기에 풀어주었다.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에는 나와 같은 프리랜서 혹은 풀타임 혹은 준비생 심리상담사가 많다. 거기서 종종 눈에 띄게 올라오는 글들 중 하나는 나이에 대한 고민이었다. 30-40대, 이 나이에 준비해도 괜찮을까요. 수련을 쌓는데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데 괜찮을까요. 나 역시 그랬다. 상담쪽 일은 수련이나 경력이 매우 중요하고,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높다. 때문에 내 성격에 안 해봤던 질척거림을 요즘 가장 많이 해본다. 지금은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이번에는 취업이 발목을 잡기에, 주위든 커뮤니에든 답을 들어도 해결이 짜란-되지 않을 질문들을 따발총처럼 쏴 재꼈었다. 할수 있어요, 괜찮죠라는 위로와 용기의 말을 듣고 싶었을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이 드라마처럼 역경을 견뎌 성공한 사례를 보고 위안이 되고 싶었던가.
그렇게 수많은 고민과 질문으로 엉겨 붙은 문제들을 피부로 마주하고 난 증인으로써 느끼는 것은 놀랍게도 비누를 마주한 생각과 같았다.
"그래, 이제 그만 질척거리자."
고민도 내 몫이지만, 결정도 내 몫이다. 질척거려봤자 결국 선택은 내 몫이다. 그만 질척 거리고 내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정보를 모으고, 선택이 헛되지 않게 나에게 질문하자.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떠냐고. 불안하다고 답해줄 내 마음을 잘 쓸어 모아 도닥이고 단단해지도록 하는 것 또한 내 몫이다.
그래 이제 그만 질척거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