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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ng Mar 14. 2021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때

추억은 방울방울

 여행이 어려운 요즘, 과거의 기억과 사진들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많아졌다. 역시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고 느낀다. 최근 한창 개인정보 정리를 하던 중 메일함 정리도 시작했다. 어느새 2012년도까지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추억의 기록들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해는 내가 친구랑 중국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갔던 해였는데, 핸드폰에 중국 유심칩이 맞지가 않는 뜻밖의 사건(?)이 생겨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그때 당시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의 연락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중국 핸드폰을 장만해서 사용하긴 했지만 짧게 통화할 때만 사용했고, 서로의 일상을 좀 더 자세히 공유하기 위해서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록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쭉 선명하게 찍힌다.  


 #추억 1 - 먹거리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정도 위로 올라가면 중국 길림성의 성도 '장춘(長春)'에 도착한다. 나는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 요소들 중 제일가는 첫째는 바로 먹거리다. 사람을 소소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 중 ‘음식’ 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중국의 수많은 유명 음식들보다는 학교생활 중 먹었던 음식들이 더 그립다. 만약 이곳을 다시 가서 하루를 보내라 한다면 아침엔 학교 식당 계란볶음밥을 먹고, 점심엔 학교 뒤 허름하지만 소문난 맛집에서 마라탕 한 그릇을 비운 후, 자주 갔던 찻집에 가서 우롱차로 얼얼해진 입안을 달래며, 저녁엔 마라샹궈와 칭다오 맥주를 먹고, 마지막 입가심으로 이름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던 학교 슈퍼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이다.


#추억 2 - 여행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중국 친구들과 같은 방을 쓸 수 있어서였다. 언어를 가장 빠르게 배우는 지름길은 그 나라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갔던 그 해부터 학교 방침이 바뀌어 버려서 한국 친구들하고만 기숙사를 쓰게 되었다.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이라 허탈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와 버린걸. 그래서 한동안은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었다. (때문에 내 첫인상은 꽝이었다고 함) 그렇게 중간시험을 치르고 난 후 약 2주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중에 같이 온 친구가 여행을 가자고 졸랐다. 나는 “야 공부하러 와서 무슨 여행이야~돈도 많이 들고 부모님한테 달라고 말하기도 좀 죄송스러워, 다른 친구랑 다녀와.”라고 좋게 거절하였으나 내 친구는 3일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바짓가랑이 붙들고 사정을 하였다. 친구가 왜 여행을 가야 하는지 나에게 설명한 것들을 다 적자면 A4용지 빼곡히 앞 뒤로 한 장 정도는 채울 듯했다. 결국 나는 부모님께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SOS메일을 보냈다. 메일함에 그때 보냈던 것이 남아있는데 왜 이리 다시 보기가 민망한지.. 구구절절 늘어놓은 사정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메일을 읽고 전화가 왔는데 처음엔 역시 안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었다. 안 그래도 중국이라는 나라에 보낸 것도 매일 불안한데, 학교에만 있어도 모자랄 판에 여자애 둘이서 어딜 돌아다닐 생각을 하냐며부터 시작해서 한 시간 가량을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나도 고집으로는 지지 않는 성격이라.. 열심히 두드렸더니 문이 열렸다. 그렇게 나는 친구랑 여행을 시작했다. 베이징, 텐진, 하얼빈, 상해, 사천, 등 다니는 동안엔 재밌고 신기해서 좋았지만 친구가 말한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가 딱히 와 닿진 않았는데, 한국에 돌아오고 더 시간이 지나 지금 나이가 되니 그때 그 시절이라 불릴만한 작은 행복의 조각이 마음속에 예쁘게 저장되었고 힘들 때 언제든 꺼내볼 수 있으니 참으로 성공적이다 생각했다. 그때 자력으로 다녔던 경험이 현재에 와서는 해외여행 경험이 없는 남편을 이끌고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했다.


#추억 3 - 互相帮助(서로 돕는다)

 우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이곳에서 6개월을 보낸 다른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학교 안내를 받으면서 중국인 친구들도 몇 명 소개받았는데, 마침 그들은 한국어과 학생들이라 우리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도 우리도 서로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같은 목표 아래 ‘서로 돕는다.’의 의미의 후샹빵쮸(互相帮助 - 한국어 발음으로 읽음)를 시작했다. 내 짝꿍은 수줍음이 많던 귀여운 아이였는데, 중국어를 알려줄 때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덕분에 실력도 꽤 늘고 말문(?)이 좀 트였던 듯싶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원어민 선생님들이 중국어로만 수업을 하시니까 듣기가 많이 늘고, 짝꿍이랑 수업할 때는 말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역시 언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그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게 맞다. 한 학기 동안인데도 이렇게 스스로 체감하는 게 다른데 몇 년이라고 하면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내 짝꿍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텐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글을 쓰면서 다시 추억여행 한 번 다녀오니 뭉클하고 아련하다. 그때 당시 주고받았던 엄마와 남편의 애정 어린 이메일들이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나를 힘 내게 한다. 남편은 나에게 종종 말한다. “넌 가끔 현재보다 과거에 너무 머물러있어”라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과거의 좋은 기억들과 경험들은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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