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세상에 처음 나와 울음을 터뜨리던 그 순간, 나는 그저 작고 무력한 존재였다. 춥고 낯설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나를 안아줬다. 따뜻한 품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사람이 나의 어머니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 처음으로 그 작은 손을 잡았을 때. 손가락이 얼마나 작던지, 내 손가락 하나를 꼭 쥐는 그 힘이 얼마나 작던지. 그런데 그 작은 힘이 내 가슴을 얼마나 크게 흔들었는지. 그 순간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태어나던 날 어머니가 느꼈을 감정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은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자라서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사슬.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자식의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부모의 눈으로 보면 보이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왜 그랬는지, 왜 그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걱정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내가 부모가 된 후에야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진작 알았더라면, 진작 이해했더라면.
부모는 완벽하지 않다. 나의 부모도, 그들의 부모도, 그 위의 부모도. 누구도 완벽한 부모로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 아이를 안는 순간, 모두 처음이다. 매뉴얼이 없다. 정답이 없다. 그냥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들고 시작한다. 그 사랑이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 사랑이 있었다는 건 안다.
나도 그럴 것이다. 딸아이에게 서툰 부모일 것이다. 잘해주고 싶은데 상처를 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아이가 나중에 부모가 됐을 때, 아, 아빠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이해해줄 날이 오길 바란다.
그렇게 이해는 한 세대씩 늦게 도착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존재다. 누군가의 자식이면서, 누군가의 부모. 부모님 앞에서는 여전히 아들이고, 딸아이 앞에서는 아빠다. 그 두 자리를 동시에 살고 있다.
부모님을 볼 때는 내가 아직 아이처럼 느껴지고, 딸아이를 볼 때는 내가 어른이어야 한다는 걸 느낀다. 그 사이 어딘가에 지금의 내가 있다. 완전히 어른도 아니고, 완전히 아이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인도에서 살면서 본 장면 중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할머니가 손자를 안고 있었다. 할머니 옆에는 그 손자의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의 딸이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딸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손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웃고 있었다. 그 세 개의 웃음이 겹쳐지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봤다.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 그런 모습이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실로, 시간을 넘어,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손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어머니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나의 손에서 딸아이의 손으로. 그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 삶이다. 내가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도 딸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 온기가 언젠가 이 아이의 아이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면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먼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시작된 그 온기가 나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부모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부모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시작이 되고, 서로의 이유가 된다. 이 단순한 사실이, 생각할수록 너무 크고 너무 아름답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왔고, 누군가를 향해 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