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는 26살 사회초년생이 3년 안에 1억 원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개설되었다. 그동안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고군분투했던 기록은 브런치에 그대로 쌓여있다. 이런 내가 첫 회사를 퇴사하고 3주 동안 400만 원을 소비에 태웠다. 누군가에겐 겨우 400만원 플렉스한 걸로 뭐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회사생활 2년 4개월을 하면서 6천만원 이상을 모았을 만큼 재테크에 진심인 내게는 상당히 이례적인 소비였다. 오늘은 (내 기준에서) 큰돈을 써보면서 느낀 점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내가 소비에 쓴 목록은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바꾸기(당근에서 자급제폰을 중고로 샀음, 75만원), 일본여행(120만원), 네팔여행(230만원)이다.
1. 소비는 즐겁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일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에 돈을 쓰는 일은 무엇이든 즐겁고 행복하다. 어느 카드사 CF 카피가 떠오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간의 인고의 시간을 소비(여행으)로 풀어보라는 제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돈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약간의 거부감이 들어서 다른 방법으로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해서 일터로 어쩔 수 없이 출근하고 그곳에서 번 돈으로 소비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어쩐지 구조가 악순환처럼 보였고, 기이했다.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대부분 '일시적'이며 지속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스마트폰, 새로운 차, 새로운 가방을 사본 사람은 안다. 그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내 것이 질릴 때마다, 돈이 생길 때마다 또 다른 상품을 욕망하게 된다.
그러나 오랜만에 스마트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나니, 역시 돈값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머리로는 돈으로 구매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 자체와 비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을 주고 행복을 사는 게 너무나도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보니 인지부조화가 왔다. 요즘 유행하는 '도파민 중독'이라는 말처럼 도처에 '자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고리타분한 철학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 그저 돈을 적게 지불하고 많은 자극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돈의 가성비'에 대한 이야기만 넘쳐나는 것 같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돈을 모았다면, 이제 그 돈을 어떻게 지헤롭게 소비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매체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기준과 줏대를 명확하게 세워야 한다. 그래야 혼란한 세상에서 내 자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
2. 소득은 없고, 소비만 있으면 이상야릇한(?) 불안감이 든다
매달 잔고가 꾸준히 늘어나는 '흑자 생활'을 하다가, 난생처음으로 꾸준히 돈이 줄어들기만 하는 '적자 생활'을 경험하다보니 이러다가 언젠가는 잔고가 바닥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돈은 충분히 많이 남아있고, 두세달 안에 재취업을 할 것이기에 걱정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잔고가 꾸준히 줄어드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다보니 이상야릇한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행동에 돈이 드는 곳이기 때문에, 남은 잔고는 곧 남은 수명이기도 하다. 돈이 모두 떨어진다면 호흡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어른들은 이직할 직장을 알아보지 않고 직장을 관둬버리는 건 비즈니스세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생 가운데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어서 참 좋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그저 '자연인'(사실상 백수지만 ㅎㅎ)으로 살아보는 경험도 내게는 소중하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곳을 완전히 벗어나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그 안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기가 어려운 법이다. 다음 커리어, 다음 스탭을 고민하며 자유로운 현재 상태를 온전히 누리는 경험을 하는 것. 내가 이직할 직장을 확정 짓고 퇴사하지 않은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3. 시간이 많으니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라는 인삿말이 한국에서 얼마나 공허한 약속인지는 모두가 알 것이다. 퇴사를 하고 나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을 한명 한명 찾아가서 만났다. 못 나눴던 근황도 나누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구나 새삼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란 곧 돈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시간 단위로 계산되어 '시급', '월급' 등으로 지급된다. 거의 모든 직장에서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자율출근제라고 해도,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최소시간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일정 시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향응하는 임금을 받는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곧 돈이다. 사회인이 되면 멀리 사는 친구들을 만나기가 정말 어려운데, 오고가는 시간을 돈처럼 생각하면서 계산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실제로 교통비는 시간에 따라/거리에 따라 비례하여 증가하기에 이 또한 시간이 곧 돈임을 방증한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으니까 어떤 약속이든 부담없이 잡을 수 있는 마법이 펼쳐졌다, 친구가 못 온다면 내가 간다. 대부분 내가 찾아갔다. 못 만날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재취업하기 전까지 대략 2~3개월 정도의 시간이 자유시간으로 주어졌다. 이 시간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즐겁게 노력할 것. 책도 많이 읽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재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간 해왔던 활동도 포트폴리오로 만들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위해 열심히 발자국을 많이 찍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