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파이 May 08. 2024

어버이날 배송된 어버이의 귀한 아이스박스

가득 담긴 마음들이 냉장고에서 밝게 빛나네

나는 요리에 흥미가 없었다. 자취의 역사는 이십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내가 직접 음식을 해 먹은 적이 거의 없다. 먹을 것에 진심인 엄마는 딸의 안위를 항상 걱정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도시락 싸다니던 세대라 삼시세끼 집밥을 먹은 거나 다름없었다. 딸이 대학생쯤 되었으면 해방감을 맛볼 만도 하신데, 집에 갈 때마다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시거나 아이스박스 택배로 보내주셨다. 그 시절, 엄마의 아이스박스 택배는 그리 반가운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어린 맘에 엄마의 정성은 알지만 뜯어서 정리하는 게 귀찮았다. 집에 가득한 반찬냄새도 싫었다. 엄마는 손이 거친 탓에 깔끔하게 보내주시지 않아 박스엔 뭔가 항상 흐르고 묻어있고 지저분했다. 뒷정리가 힘든 것도 불만이었다.


자취방 냉장고는 작기도 작아 음식을 다 넣을라치면 냉장고가 터지게 마련이었다. ‘아 엄마는 왜 이렇게 뭘 많이 싸준 거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때쯤 냉장고엔 더 이상 음식을 넣을 공간이 사라지고 정리는 끝이 났다. 사 먹는 게 훨씬 맛있는데 차라리 용돈을 더 주면 좋겠다 생각할 만큼 철없는 딸이었다. 그래도 집에 다녀오거나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보내주신 그런 날엔 자취하는 친한 친구들을 불러다가 집밥을 같이 먹었다. 물론 나도 친구들도 치킨을 훨씬 좋아해서 밥에 반찬은 대강 먹어치우고 2차로 먹는 치맥에 훨씬 비중을 뒀지만 말이다.


엄마에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비빔밥 재료를 하나하나 만들어 위생백에 한 끼 분의 비빔밥 재료를 소스까지 만들어 포장해서 열개 스무 개씩 보내주었다. 게으른 딸내미가 잘 안 해 먹는 걸 알고 제일 손쉽게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내신 거였다. 그럼 난 밥만 해다가 재료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쓱쓱 비벼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뿐만인가.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들은 물론이고, 국이며 죽이며 떡이며 다 종류별로 한번 먹을 양으로 하나하나 소분해 냉동해서 보내주셨다. 양념 고기도 다 구워서 소분해서 포장하여 나중에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금으로 치면 밀키트를 잔뜩 만들어주신 셈이다. 엄마표 감자탕이나 육개장을 좋아하는 걸 알고, 나 보러 오실 때면 차에 냄비째 한가득 싣고 갖다 주시기도 했다.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엄마라면 그렇게 해줘야 하는 걸로 알았다. 아이를 키우고서야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되면 다 저절로 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절대 아니었다. 어떻게 엄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요리를 하셨을까.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난 매일 집밥을 만들어 건강한 밥상을 차려주는 우리 엄마 발 끝에나 미칠 수 있을까. 어릴 시절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 집에 들어가면 항상 뭔가 바쁜 손놀림으로 왔다 갔다 하며 뚝딱 음식을 만들어내는 슈퍼맨 같은 엄마가 집에 있었다. 딱딱딱 도마에 칼날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보글보글 무언가 끓는 소리, 퐁당 집어넣는 소리 뒤로 따라오는 얼큰하고 깊은 냄새. 엄마의 저녁식사는 그렇게 나에게 위로를 가득 주었다.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해도 마음이 한껏 풀어지고 긍정의 힘이 되살아나던 엄마의 음식. 밖에서 아무리 상처받고 왔어도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고 사랑받을만하다는 걸 한껏 느끼게 해주는 엄마표 음식. 밥 다 먹고 한껏 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그제야 엄마를 바라보면 엄마 눈에 흐뭇한 미소 한가득이었다. 내 아이에게 내 음식이 그런 의미면 좋겠다. 요리에 흥미도 없고 잘 못하는 나지만, 그래서 아이에게 엄마표 소울푸드 몇 개 정도는 꼭 만들어주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띵동. 어버이날에 아이스박스가 도착했다. 엄마다! 역시 이번에도 무질서하고 정신없다. 줄줄 새고 뭐가 합쳐지고 난리가 났지만, 이제 이런 걸 보면 정겨워서 웃음이 난다. 치우는 건 일도 아니다.

“아이, 엄마!! 어버이날 보내면 어떡해!! 내가 어버이 같잖아.”

“너도 어버이지. 용돈 잘 받았다. 엄만 돈이 최고여. 듬뿍듬뿍 벌어서 용돈 많이 보내주면 젤 좋아. 깔깔깔. 나물 같은 건 쉴지도 모르니깐 얼른 냉장고에 넣어서 한번 끓여 먹어라. 꽃게 데친 거는 된장찌개 해 먹고. 이번엔 많이 안 보냈다.”

“많은데?”

“야야 아직도 양 가늠을 못하냐. 한두 번 먹으면 끝이야.”

“알았어. 담엔 더 많이 보내줘. 고마워, 엄마.”


바리바리도 싸주셨다. 나물에 생선에 꽃게에 참기름에. 난 아직도 맨날 받아먹기만 하는 도둑놈 같은 딸이다. 다음엔 더 많이 보내달라는 염치없는 딸이기도 하다. 내가 해드릴 나이도 됐건만 또 이렇게 잔뜩 받고서 좋아하는 철이 덜든 딸. 이러니까 자꾸 내 소울푸드 개발에 차질이 생기는 거야, 엄마. 너무 든든하잖아요.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여사님 용돈 듬뿍 드려야겠다. 마흔 넘은 딸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 시린 어버이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 시키려는 아빠 vs. 질색하는 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