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크리스토퍼 놀란, 2023)
킬리언 머피부터 이야기하자. 과장을 조금 보태면, 머피의 오펜하이머는 게리 올드만의 처칠(〈다키스트 아워〉(2017))이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링컨(〈링컨〉(2012))에 견줘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그렇다. (진짜 오펜하이머처럼 생긴 머피의 겉모습은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데, 이는 후술하기로 하자.)
차이라면, 두 베테랑 배우의 처칠과 링컨이 각자의 영화에서 구심을 담당하는 반면 머피의 오피는 원심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게리 올드만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시종일관 영화의 모든 중력을 자기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구부러뜨린다. 그들의 딜레마는 그들이 프레임 안에서 온몸으로 치르는 고단한 분투 끝에 쾅! 하고 터져 버리고, 끝내 그 자신 안에서 해소된다. 그러나 머피의 오펜하이머에는 그런 오르가즘의 순간, 분출의 쾌감이 없다. 그는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는다며 아내에게 야단맞는 남편이고, 내면을 한껏 응축시켜 폭발시키기보단 폭발을 마주하고 반응하는 인물, 그런 뒤 부르르 떨면서 파동을 퍼뜨리는 핵분열적 인물이다.
그런즉슨, 맨 앞의 문단은 정정할 필요가 있다. 킬리언-오펜하이머와 게리-처칠, 다니엘-링컨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이는 단지 배우의 역량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의 초점에 관한 이야기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클라이맥스를 킬리언 머피의 몸이 아닌 트리니티 실험에 외주를 맡겼다. 놀란의 시선은 음소거된 핵폭발 자체보다도 폭발에 뒤이어 오는 후폭풍에 닿아 있다. 요컨대 〈오펜하이머〉는 뒤의 한 시간을 위해 앞의 두 시간을 필요로 하는 영화다.
그러나 이 후폭풍이 몰고 오는 감정의 진폭은 다소 아쉬운데, 그건 안타고니스트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스트로스는 산만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맷 데이먼의 연기도 그러하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빗줄기가 일으키는 파문과 그걸 바라보는 오펜하이머. 뒤이은 킬리언 머피의 그윽한 푸른 눈. 보이는 곳 너머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아득한 시선은 영화의 프롤로그를 아름답게 긴장된 우주적 이미지로 물들인다.
그러나 배우 특유의 깊은 눈빛은 놀란의 잦은 플롯 교차에 휩쓸려 금세 초점이 흐려지고 만다. 이러한 초점의 분산이 흑백과 컬러, 시점(時點)과 시점(視點)의 선명한 대비를 기대하는 의도된 연출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테넷〉의 어지럽고 산만한 구성과 달리 〈오펜하이머〉의 플롯은 놀란의 의도를 매우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관건은 놀란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가장 복잡다단한 인물 중 하나인 오펜하이머의 생애 너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놀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항상 놀라운 스펙터클의 광경을 보게 되지만, 강렬함을 한꺼풀 들춰낸 그 너머는 항상 공허하거나 나이브하다. 그는 갈고닦은 연출 기법들을 활용하여 열심히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시각화하려 하지만, 블랙홀을 관통한 〈인터스텔라〉의 매튜 맥커니히가 어린 딸 머피의 늙어버린 껍데기를 보았듯, 〈오펜하이머〉가 보여주는 것은 킬리언 머피의 외면에 이식된 완벽한 오펜하이머의 거죽뿐이다.
머피의 망연한 시선은 영화 막판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물리적 시계 너머의 불바다를 예견하는데, 이때의 장관은 오펜하이머가 봤을 법한 묵시록적 광경이라기보단 놀란이 보여주고 싶은 윤리적 판결문의 스펙터클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판결은 조금 이상하다. 그가 지목한 피고가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노라고 자처한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엉뚱한 스트로스이기 때문이다. 흑백의 프레임에 갇힌 낯선 인물은 사태의 배후가 되어, 예수를 박해한 가야바와 같은 쪼잔하고 음험한 권모술수의 화신처럼 그려진다(그의 곁에서 알짱대며 청문회를 돕는 체하다 그에게 경멸의 시선을 돌려주는 정부 인원은 관객이 그를 통해서 이 영화의 윤리적 판결에 동의하게끔 하기 위한 렌즈 '장치'다).
이때 스트로스는 단지 한 명의 인물일 뿐 아니라 파멸의 연쇄작용을 멈추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대표하며, 그들에게 박해받는 오펜하이머는 그 스스로가 절멸의 트리거인 동시에 이러한 과정의 전모를 파악하고 예언하는 신적인 관찰자의 위치에까지 올라선다(이렇게 보면 그는 카산드라 같기도 하다). 그 자리는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 서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가 당하는 취조는 어디까지나 재판이 아닌 비공식적인 절차일 뿐이며, 실제 세계에서 그가 겪은 치욕은 놀란에 의해서 아릿한 영광으로 되돌려진다.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서 머피가 겪는 치욕은 치욕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일련의 모욕적인 심사 과정 전체가 그의 순교를 빛내기 위한 연출된 시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충고를 떠올려 보자. “당신의 목에 메달이 걸리는 건 당신을 위한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오.”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핵실험장에서의 소리 죽인 5분이나 연설장에서의 숨막히는 아이러니가 아니다. 짧게 스쳐가는,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의 이중성을 성토하는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내파렌즈의 정확한 초점이다.("그는 히로시마나 나가사키가 아닌 트리니티로만 기억되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나에게 감사해야 하네!")
오펜하이머의 본심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치의 핵 개발을 지연하려 했다는 독일의 천재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본심이 그러하듯이, 본심이나 진심이라는 것은 결코 우리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암흑의 영역에 놓여 있다. 놀란은 그 불가지의 심연에 기꺼이 몸을 내던져 입자와 파동의 중첩을 확인하려 하기보다는, 빛과 어둠을 대별하며 명확한 윤리적 판결을 내리려는 듯하다. (아인슈타인과의 대화 장면을 왜 여백으로 남겨 놓지 않은 것일까?) 결국 〈오펜하이머〉는 심판을 예언하는 묵시록과 어설픈 휴머니즘의 요상한 조합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재판인지 아닌지도 모를 재판, 두루뭉술한 결론이다.
매개된 렌즈가 원래의 초점을 왜곡하듯이, 스트로스는 롭을 통해 제 의도를 흐린다. 마찬가지로 놀란은 순교를 떠올리게끔 하는 머피의 우수 깊은 눈매를 통하여 우리의 넋을 의도한 대로 흔들어놓는다. 이건 과학자나 예술가가 아닌 정치인의 태도다.놀란은 인간 오펜하이머가 아닌 순교자 프로메테우스를 보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 앞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