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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Mar 26. 2024

나는 나, 시대는 시대, 소설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나, 시대는 시대, 소설이 거기에 있기에…


뒤샹의 '샘'과 퍽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뭐랄까, ‘한 번 닦으면 끝’인 깔끔한 똥 같으면서도 몇 번 더 뒤를 확인해 보고 싶어지는 이상한 소설이다. 『노블리스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은 어느 소설가의 아침나절 동안 이어지는 너절한 이야기—바나나를 우물우물 씹어먹고 따뜻한 차를 내려서 마시기도 하며, 똥을 싸고, 닦아내면서 그 행위에 대한 단상을 다섯 페이지 동안 지껄이기도 하는—인데, 이런 종류의 현대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별다른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소설을 쓰려고 앉았는데 막상 뭘 써야 할진 모르겠어서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오가면서 주변인들 뒷담화도 좀 하고, 그러다가 스스로의 막막한 처지도 자조하며 주절주절거리는, 딱 그런 오늘날 ‘망생이들’의 별 볼 일 없는 이야기.


작가는 왜 이렇게까지 수치스러운 얘기들을 가감 없이 보고하는 걸까? 쿤데라식으로 말하자면 키치에 대한 폭로쯤 되려나. 무심코 공중화장실 변기를 열었다가 타인의 똥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구역질이 나서 제대로 들여다볼 수도 없겠지만, 소설이라는 삶의 완충지대를 경유하고 나면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어떤 페이소스나 에피파니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똥’은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기보단 (가능한) 우리 모두의 현실을 지시한다. 똥을 싸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똥을 싸면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도 없고.


물론 『노블리스트』는 뉴미디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의 무기력과 아스퍼거 성향에 대한 하이퍼리얼리즘적인 묘사나 풍자—'이 나약한... 징징대면서 빵이나 먹는 놈들...'—에서 그치진 않는데,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은 곧잘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세상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으로 전도되기도 하고, 메타소설답게 소설쓰기란 무엇인지 골똘히 자문하며 궁리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지금 소설을 읽고 쓰는가? 그러지 않고서는 “개 같은 팝업 창과 스팸 메일”의 형식으로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치 실험실의 쥐처럼 자극에 반응할 뿐”인 채로…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한다. 소설은 해석의 총체다.


혹자는 그런 따분한 해석 놀음이 무슨 소용이냐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뭐, 솔직히 말해서 그것 또한 나름의 해석과 관찰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는 입장으로서는 그다지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게다가 꽤나 타당한 해석이기도 한 것이, 다독은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소설 속 화자의 옛 친구였던 에릭처럼 책 많이 읽은 사람들 중에 나쁜 쪽으로 돌아버리고 이데올로기에 스스로를 묶어버린 멍청이들도 수두룩하니까… 그들이 “도덕적 입장이라고 여기는 것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불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정당화일까?”


아무튼, 문학이 현실이나 인간을 바꿔 놓을 수 있느니 없느니 어쩌고저쩌고 하기에는 이미 조금 멋쩍어졌다는 얘기다. 그냥 읽고 쓴다 뿐이지. 저자의 말마따나 "삶에 관한 진실은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생애 주기에 역동적으로 임하는 자세, 즉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성에 가까운" 거니까.






당장 이 책을 읽는 내내 스마트폰과 SNS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 놓고 나서도, 글을 쓰는 동안에만 수도 없이 디씨인사이드를 들락거렸다. 인스타그램도 몇 번씩 켜서 구경했다. 나 자신과 괴리된 채로. 아마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 같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소설을 써야 한다고—생각하고 뭔가를 하기 위해—소설을 쓰기 위해—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겠지만 정신은 금방 딴 데 팔릴 것이고, 소설의 화자처럼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과 새로고침 강박을 느끼며,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극에 반응하며 산만하게 두리번거릴 것이다. “내가 변해 다른 사람이 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일시적이나마) 단절의 계기라는 건 또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거라서, “그곳에 살 땐 그저 절망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현재 같았”던 것이 무심코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되는 수도 있다. 사람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 “과거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과거가 변할지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온전히 달려 있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내가 훌륭한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건 누구라도 그렇다. 그래도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것 자체가 워낙 불확실하지 않은가. ‘나’는 과거의 더미일 뿐일까? 어쨌거나 확실한 건 그거다. 내가 다른 내가 되고자 한다면, 일단 지금 당장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거.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정말로 지금의 ‘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있다. 과거는 해석의 재료고, 소설은 해석의 총체다.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은 다르게 해석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글피에는 조금 더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삶에 관한 진실은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생애 주기에 역동적으로 임하는 자세, 즉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성에 가까운 것”이다. “잘못된 질문을 던지다 보면, 결국에 시들시들한 삶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의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 수밖에”.


그러니까, 이 소설은 화자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것이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이나, 그 역도 진실이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 내일은 우리의 몫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빽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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