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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이 손님들께 보약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춘천 금병산 숯불 철판 닭갈비 석남순 님

춘천 김유정역에 내려 탁 트인 넓은 길을 건너면 실레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서부터 맛있는 숯불 닭갈비 냄새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중에서도 파라솔이 딸린 야외 테이블이 있는 빨간 지붕 닭갈비집. 금병산 닭갈비에 들러 정말 맛있고 따뜻한 점심 한 끼를 먹었다.


식사하며 나눈 몇마디가 인상적이어서 손님맞이로 바쁜 분을 졸라 인터뷰 날짜를 여쭈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뵌 날은 마침 김장날, 우리가 일정보다 조금 늦어지자 '에이, 안 오려나보다' 하고 막 무를 썰어 버무리고 계셨다고 한다. 햇살이 비춘 식당 뒷마당에는 오늘도 손님들에게 내놓을 직접 키운 채소들이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있었다.




정도 많고 일복도 많은 포근한 밥집 할머니,
석남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만약 저승사자를 만나서 한다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다 적어가야 한다고 맨날 그래요. 농담처럼. 이 나이에 벌어 놓은 것만 잘 쓰며 살아도 좋잖아, 그런데 나는 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우리 남편이랑 이렇게 식당을 하고 있어요.


나는 매일 아침마다 기도를 해요. 믿는 종교도 없지만, 옥상에 올라 금병산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식당에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에게 우리 집 음식이 보약이 되게 해 주세요’ 라고요. 사람들이 식당밥은 금방 허기진다고 하잖아요. 집밥은 정성이 들어가는데 식당밥은 안 그렇다고요. 그런데 우리 집은 안 그래요. 우리 집 단골분들은 우리 집 밥 먹으면 살이 찐대요(웃음).


닭갈비를 구워주시던  곱디고운 사장님과의 첫 만남


안 해본 일 없던 억척같은 40년 세월,
스스로에게 자신 있는 삶


여기 춘천으로 온 지 40년 됐어요. 스물넷에 시집와 여기로 왔는데 벌써 올해 육십 넷이에요. 이런저런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그래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자신 있게 살아왔어요. 살아보니까 서로 돕고 양보하고 내 이웃이 넘어질 때 서로 일으켜준다면, 이 세상에 경찰은 왜 필요하고 벌 받는 사람은 왜 계속 늘어날까 싶어요. 다 욕심을 내서 그런 것 같아요.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면 되는데 말이야. 예를 들어 맥주만 마셔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는데 욕심내서 양주 마시려 하고, 김치만 놓고 다 같이 오손도손 밥 먹어도 맛있는데 욕심내서 소고기 먹으려 하다가 체하는 거잖아요. 내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정직하게 살았어요. 내가 바로 서고 건강하면 남의 손 빌릴 일도 욕심을 낼 일도 없잖아요. 


안 해 본 일이 없었어요. 막노동도 하고, 남의 가게 일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해보고, 가리지 않고 일했어요. 그래도 늘 긍정적으로 살았어요. 화장실 청소할 때 화장실이 더러우면, ‘에이, 내가 전생에 화장실 청소 참 안 하고 살았었나 보지, 그래서 나한테 이 일이 걸려들었나 보다’, 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어떤 양반이 어제 힘든 일이 있어서 술을 많이 잡숫고 이렇게 다 쏟아놓고 가셨나 보다’ 하면서요. 더럽다고 생각했으면 그 일 못했을 거야(웃음). 그렇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돈이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건 다 아껴 쓰고, 그땐 그랬어요.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우리 남편이 5형제의 막내아들이에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우리가 열심히 아끼고 모아서 지금까지 온 거지요. 

아휴~ 말도 마. 우리 가족 고생 정말 많이 했다니까요. 어떤 날은 돈을 너무 힘들게 벌어서 차마 못 쓰겠는 거예요. 자려고 누웠는데 그날 번 돈 안 쓰고 천장에 붙이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때도 있었죠.


너무 고우신 모습에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사장님의 세월들


나이 50이 훌쩍 넘어 시작한 밥장사


식당을 늦게 시작했어요. 오십여덟 인가에 시작했으니까. 그 즈음 아들이 경영학과 졸업 후 춘천에 있는 골프장으로 취직을 했는데 월급을 적게 받으면서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2시가 다 되서 돌아오는 거예요. 고생해서 일 하는데 월급은 적은 것 같고, 그 마저도 야근하면 차비가 또 들고 하니 계산이 안 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들한테 ‘엄마랑 장사를 해볼 생각 없느냐’, 했죠. 그래서 같이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지금의 절반 만한 공간으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집에서 식구들 먹일 밥만 하던 내가 장사를 한다는 것이 엄두가 안나 지인에게 배워 시작했지요. 음식은 어떻게 하고 손님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그렇게 배워도 겁이 가시질 않았는데, 어느 날 절에 가서 뵌 스님이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걸 하시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응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첫발을 내딛었지요.



밥장사가 안되어 부추를 손질에서 팔 던 때도...
그래도 아들 덕에 든든했던 시간들


시작은 닭갈비를 안 하고 돼지갈비랑 백반을 팔았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없었어요. 잘 못했으니까. 그래서 장사가 안될 때는 직접 심은 부추를 아침마다 다듬어서 아들을 시켜 동네 식당에 배달해 팔았어요. 하루에 6만 원, 1주일에 세 번씩 팔면 18만 원. 고기는 못 팔았지만 그게 어디야. 이랬으니 처음에는 아들한테 월급도 제대로 못 줬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은 그것도 허투루 안 쓰고 적금까지 들어서 날 주더라고요. 너무 고마웠지요. 그 때 고생도 많이 했지만 아들이랑 함께 해서 말할 수 없이 든든했어요. 


그러다 장사가 자리 잡혀 가면서 아들한테 가게를 맡겼지요. 한 7~8년 전부터는 닭갈비 메뉴도 시작했어. 이 곳에 문학촌, 레일바이크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제법 춘천으로 놀러 왔어요. 전철역도 생기고요. 


손님상에 낼 김치를 담그시는 모습, 그리고 사장님 곁을 지키는 강아지들


아파서 쓰러져도 가족 생각에 금방 일어났지.


작년에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뇌경색이었어요. 그동안 고생을 말도 못 하게 했으니 몸도 힘이 많이 들었을 거야. 처음엔 손도 못 움직이고 가족들이 다 씻겨주기까지 했어요. 아들이 퇴근해서 머리 감겨주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손도 움직이고 훨씬 건강해졌어요. 이렇게 걸어 다니고 매장에서 손님도 맞으면서 일도 하잖아. 

한참 아플 때 간병인을 써야 하는데, 그 비용을 계산해 보니 ‘우리가 닭갈비 1인분을 6천 원에 파는데 이 돈을 내려면 우리 아들이 나 없이 혼자서 하루에 몇 그릇을 더 팔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간병인을 못 쓰겠더라고요. 몸이 아파서까지도 또 고생을 사서 했지요.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병원에 있으면서 회복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 거예요. 100명 중에 나 같은 사람 열 명 안에 든대요. 이렇게 빨리 회복된 사람이 없었다고요. 다 가족 덕분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몰라준다 해도
나는 손님들에게 맛 좋고 건강한 음식을 내드리고 싶어요.


닭갈비를 시작하고 제대로 해보려고 양념 공장을 찾아 배우려고 가봤는데 상상하지 못할 양의 조미료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틀 만에 ‘나는 안 배울래요’, 하고 돌아왔어. 집에서 직접 야채를 갈아서 만들어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훨씬 담백하고 건강에 좋지요. 젊은 사람들은 매번 밖에서 먹어서 잘 모를 수 있지만 음식에 조미료를 많이 넣으면 텁텁하고 느끼해. 신선하지가 않아요. 우리는 고기만 먹어봐도 이건 며칠을 재웠고 어떤 양념을 어디서 떼다가 쓰는지 다 알아요. 가족들도 먹는 건데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래서 우리집은 조미료는 안 써, 직접 심고 길러서 우리가 만들지요.


음식은 정성이 최우선이어야 해. 조금이라도 영양가 있게. 식당이라고 막 하면 안 돼요. 우리 집은 쌀은 농사 안 지으니 쌀은 사다 쓰지만 고추는 직접 기른 고추에 산 것은 조금만 섞어 쓰고, 나머지는 다 직접 키운걸 상에 내요. 길러서 쓰는 게 70% 정도이고, 사다가 쓰는 건 30% 정도밖에 안돼요. 아들은 직접 키운 야채 쓴다고 세무상 비용처리도 안되고 몸도 고생하니 나한테 농사 그만 지으라고 해요. 농사짓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몰라주는 세상이라고요. 그래도 그럴 수 있나?  나는 손님들에게 맛있는 걸 내고 싶어요. 그러니 우리 남편이 늘 밭에 있지요. 심고 키워서 물 주고 또 다음어야 하니까. 우리 남편은 바쁠 때만 숯 피워주러 가게로 내려와요.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은 나한테는 다 친구이지요. 단골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나는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보답하려고 하는 거야. 꾸준히 식사하러 오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 안 오시면 마음이 그렇게 아쉽고 속상해요. 어쩌면 돌아가셨나 보다 싶거든. 친구 떠난 듯 쓸쓸한 마음이 들지. (유독 손님들을 반겨하고, 친근했던 사장님의 모습이 이런 마음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숯불 닭갈비와 직접 심고 길러서 내주시는 채소들, 직접 기르신 영양부추와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가난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집에만 있어도 될 텐데 왜 그렇게 일을 찾아다니면서 했냐고? 먹고사는 게 넉넉지 않았잖아. 내가 일을 안 했더라도 우리 식구들 어떻게든 먹고 살기야 했겠지요. 그런데 빚도 갚아야지, 애들은 크지,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나는 고향이 홍천인데 큰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쌀이 떨어지는 걸 모르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시집을 와서는 형편이 조금 어려웠어요. 요즘 같으면 내 집에 먹을 게 떨어져도 친정이 여유가 되면 친정에서 가져다 먹기도 하고 나눠먹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마음이 조심스럽기도 했고, 거기까지 가려면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 돌아가야 했어. 꾸역꾸역 차멀미 해서 가느니, 없어도 차라리 안 가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니까. 그래서 나도 돈을 벌어 보탤 수밖에 없었어요.


자식들한테 가난은 물려주고 싶지가 않았어. 절대로.


이 집이 원래는 개울가였는데 남편이 손수 벽돌로 벽을 올리고 집을 지었어요. 새로 지은 집에 손님이 오시면 식사를 대접해야 하니 국수를 끓여 내드리곤 했는데, 하루는 허연 국물에 국수만 내자니 맘에 걸려요. 그래서 옆집 할머니 텃밭에 마늘잎이 올라오는 게 보여서 국수에 넣으려고 잎 몇 쪽만 주시면 안 되냐고 여쭤봤지. 시골 인심은 옆집이랑 서로 농사짓고 나눠먹고 하잖아요. 나도 친정에서 그렇게 보고 자랐으니까.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가 옆집 할머니가 면전에 대고 어찌나 무섭게 욕을 하시던지, "아주 못 사는 것들이 옆에 살면서 나한테 붙어 다 떼먹는다"고 하시는 거야.  

그 순간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나 싶다가도, 그 소리를 듣고는 얼마나 서럽던지 눈물이 한참 났어요. 그래서 ‘앞으로 절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돈 벌어서 무조건 내 땅을 사고야 만다. 거기에 좋은 것 잔뜩 심어서 나는 이웃들과 나누면서 살아야겠다’ 이 생각으로 악착같이 벌었어요. 그리고 조그만 땅을 결국 샀지. 거기에 마늘, 파 심어서 이웃들이랑 나눠먹었어. 우리도 실컷 먹고요. 아주 속이 다 후련했어.  


이 땅을 일구시며 얼마나 많은 다짐과 노력을 하셨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던 사장님의 텃밭


문학촌이 있는 마을에서 산다는 게
나에게는 행복이자 자랑이지요.


여기서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알아, 금병산이 꼭 엄마 품 같아요. 마을이 아늑하고 참 좋아요. 가끔씩 풍수지리하는 사람들이 와도 여기는 더 편안한 것 같대요. 어떤 분은 처음 와보는 동네인데도 친정집 같이 썰렁하지 않고 포근하다고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참 좋지요. 다른 동네를 가봐도 실레마을 같은 곳이 없는 것 같아. 살기 불편하지 않아 제일 좋지. 서울도 가깝고 공기는 좋고. 10분만 차 끌고 나가도 시내인데 여기서는 채소들을 직접 길러 먹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선 다들 건강하게 살아요. 


예전에 부녀회장을 할 때 전국 부녀회장들이 모여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각 자 사는 곳을 소개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김유정 문학촌이 있는 마을에서 왔고, 그곳에서 사는 게 행복이다."라고 자랑했던 게 기억이 나요. 꼭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나는 이 마을이 참 좋아.


김유정 역에 내려 실레마을로 가는 길. 금병산이 보이는 탁 트인 길은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내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한 권으로는 안 돼.
그저 열심히 산 거 밖에 없다고 할래.


어느 날인가 문학촌장님이 책을 한 권 읽어보라고 주셨어요. 부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내용이었어요. 그걸 보면서 한편 부럽기도 했지요. 나는 배움이 짧아 책으로는 못 냈지마는 내 살아온 이야기도 그 못지않은데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만약 내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제목을 뭐라고 하고 싶냐고? 아이 몰러. 나는 열심히 산 거밖에 없는 것 같아. 내 바람이라면 자식들, 손녀 손주 아프지 말고 건강했으면 좋겠어. 나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다 건강하고.



다음 생에는 이렇게 살고 싶어.


춘천에 40년을 살았어도 장사하느라 여행도 많이 못 가봤어요. 서울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오는데도 나는 가까이 있어도 못 가봤지. 우리가 결혼기념일이 11월 6일인데 작년에는 청평사를 가자고 해서 출발은 잘 했거든? 그런데 곧 아들한테 연락이 오는 거예요. "엄마 단골손님들이 단체로 오신대요." 그래서 어떻게 해, 차 끌고 바로 돌아왔어요. 아저씨랑 숯불 해야죠. 아휴~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아(웃음).


나 아는 사람들이 전부 전생에 일을 안 했나 봐, 그래서 일복이 다 나한테로 왔나 봐요. 다음 생에는 조금만 더 편하게 살고 싶어. 남들 하는 취미도 하고, 여기저기 많이 놀러도 다니고, 일하는 것보다야 덜 재밌긴 하겠지만 다음엔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우리들 삶의 원동력은 어떤 모습일까’

마치 밥 한 끼 하며 편하게 주고받은 대화 같은 인터뷰였지만, 편하게 나눈 대화 속에는 그 어떤 대화보다 더 단단한 밀도, 삶의 내공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지난날의 한숨과 고민, 그리고 놀라울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였지만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쌓아진 인생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던 날엔 ‘사장님의 이런 큰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말씀해주신 내용을 정리하면서는 '삶의 원동력이란 어떤 잊지 못할 큰 계기로 인해 어디에선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나 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꺼내어 쓰이는지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비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젠 원동력을 찾는다는 둥, 요즘 원동력을 잃었다는 둥의 핑계 따위는 어려워질 것 같다.


춘천에 40년을 살면서도 늘 손님을 위해 장사하느라 춘천여행은 오히려 못 가보셨다는 사장님의 내년 결혼기념일은 마스크 없이 맑은 공기 실컷 쐬는 ‘진짜 휴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쁜 하루 중 잠깐의 휴식시간에 기꺼이 우리와의 만남에 시간을 내주신 사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정리 by 주봉
사진 by 올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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