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백삼홈 Mar 22. 2022

오늘따라 좀 추레합니다만...

그래도 소싯적 별명이 핑크를 사랑한 핑크공주였다구요!


추레-하다 : 겉모양이 깨끗하지 못하고 생기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


마흔 넘어까지 옷장에 트레이닝복이 없었다. 숨쉬기 운동만 하고 아온 인생인지라 운동복이라는 게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3년 전 필라테스를 시작하면서 요가복을 시작으로 걷기에 맞춤화된 트레이닝복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 후 코로나19로 인해 외부 출입이라고는 마트와 산책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외출복보다는 트레이닝복을 구입하고, 입는 횟수도 늘어났다. 

조커 바지를 맛 본 후 '왜 내가 이 옷을 알게 된 것인가!' 감탄을 연발하며 교복처럼 입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강남 멋쟁이는 아닐 지라도 최대한 깔끔한 복장이었다. 집 앞 슈퍼를 갈 때도 적어도 트레이닝복은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 없었다. 트레이닝복이 조금 추레해 보인다고 생각했고, 운동할 때만 입는 옷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요즘은 트레이닝복도 멋지게 입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제 시대에 맞는 복장인 트레이닝복을 애정 하게 되었다. 


올해 입학한 소룡이(8세, 딸) 마중을 간다. 한참 친구들과 놀이터를 가더니 슬슬 흥미가 떨어졌는지 며칠 곧장 집으로 왔다. 오늘도 당연 집으로 가겠지 싶어 교복인 조커 팬츠를 입고 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좀 칙칙하게 느껴졌지만 5분이니까 괜찮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소룡이는 보자마자 친구들하고 놀겠다고  멀리 친구들과 뛰어간다. 

'엄마는 새로운 엄마를 만날 준비가... 오늘은 좀 많이 엄마가 칙칙한 것 같은데 별로 안 가고 '라고 마음으로는 외치고 있었지만 아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어쩔 수 없이 놀이터에 합류했다. 세명의 친구 엄마와 어색한 첫인사를 나눴다. 그래! 딱 삼십 분만 놀다 가자. 어차피 곧 피아노를 가야 하니 조금만 견기로 했다. 


엄마들과 아이들 이야기가 한창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들을 보니 첫 아이 입학 때 과거의 모습 내처럼 봄처럼 화사 했고, 단정했다. 반면에 나는 겨울이 이제 시작된 듯한 우중중함이 가득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첫째고 외동이라고 하니 얼핏 보니 많게는 10살 적어도 5살은 젊어 보이는 엄마들이었다. 

갑자기 따듯했던 봄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졌고, 햇살이 조명이 되어 얼굴의 잡티와 주름이 부각되고 있는 듯했다. 아차! 톤 업 크림이라도 바고 나올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옷차림은 검정 조커 바지, 검정 운동화, 검정 경량 패딩, 회색 니트였다. 원래 블랙은 멋쟁이 색이니 멋쟁이라 우겨보고 싶지만, 그냥 무채색 인간인 듯 느껴졌다. 살면서 '나 왜 이렇게 추레하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진 않았다. 적어도 깔끔하다고 자부했다. 

오늘의 추레함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결혼 전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백 바퀴 돌라고 있는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을 사며 자주 들락거렸다. 

봄에는 산뜻한 계열의 옷을 사고, 여름에는 블루와 화이트로 멋을 냈다. 가을에는 분위기 있는 브라운과 겨울에는 멋스러운 블랙으로 한껏 멋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옷으로 멋 내기에 부족해 그에 맞는 신발과 가방을 사고, 네일아트까지 하던 강남 멋쟁이 시절이 있긴 했다. 심지어 제일 애정 하는 색이 핑크여서 핑크 공주였다. 가진 물건 중 핑크색의 비중이 제일 높았던 시절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세월 탓인지 출산 후 몸매의 변화 때문인지, 애초에 화려한 옷들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세상에 색이라고는 블랙과 화이트가 전부인 것처럼 옷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들 옷 잘 입힌다는 소리도 들었고, 남편의 옷은 계절에 맞춰 화사함을 담아주면서 정작 내 옷장은 언제부터 무채색에 지배당하고 있었을까?


오늘따라 유난하게 추레하게 느껴져서 조금 우울했고, 쭈꿀쭈굴하게 느껴졌다. 소룡이 친구 엄마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건 사실이지만, 깔끔함만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소룡이에게 늙은 엄마 같아서 미안했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옷장을 열었다. 왼쪽은 화이트, 오른쪽은 블랙, 가지런한 옷들 속에서 가장 화사한 옷을 찾아본다. 

오늘 마중할 때 '이 구역에서 오늘은 내가 제일 화사하다' 잔뜩 티를 내고 입을 옷을 찾는다. 이만큼 찾았으면 한 벌이라도 있을 법한데, 버리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다 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화사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옷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장하게 옷장 문을 닫고, 지갑에서 남편 카드를 꺼낸다. 그리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이 전해 준 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