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살고 있는 그대는 5학년!
좋아하던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어쩌나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감정이 드시는 시기가 5학년 아들에게도 찾아왔나 보다. 물론, 연애감정이면 엄마가 더 설레겠지만 아쉽게도 부모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인 듯하다.
언젠가 아들만 전문으로 교육하는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열정적인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싶으신가요? 그럼, 게임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많이 웃었고, 정말 공감했었다. 열정적인 모습은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야구할 때 도 아니고, 공부는 더더욱 아니고, 오직 야구게임을 하며 공을 던지고, 치는 손가락의 강열함 그 순간의 찰나였다!.
아들의 게임시간은 초4학년까지 일주일에 한 시간이었다. 고학년이 되어 협상하에 주말 2시간 30분으로 엄청난 상향 조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렀듯, 잘 지켜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마무리할게"라는 말을 자주 또 많이 하게 되더니 시간을 어기기 일수였다. 본인이 자각한다며 손수 시계 알람까지 맞춰놨지만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습한 날씨에 요즘 계속 밤잠을 설친 남편과 냉방병에 시달리는 나는 평소와 다르게 주말에 꿀 같은 단잠의 시간을 가졌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면서 1학년 동생에게 "오빠랑 15분만 게임하고 꺼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깊은 낮잠에 빠졌다. 깊어봤자 나의 낮잠의 한계치는 대략 1시간이 채 못된다. 아니나 다를까 45분쯤 깼는데 아들은 여전히 게임 중이었고, 딸은 혼자 놀고 있었다. 눈 뜨자마자 "게임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라는 말에 지금 끌 려고 했다며 서둘러 게임을 종료한다. 예상시간보다 30분이나 넘긴 상황이었다. 뭐 게임 시간 어길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미 본인이 한 약속이 있는터라 그 모습에 잠이 벌떡 깨졌다.
사정은 이렇다. 아빠 엄마는 게임하는 시간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아이는 그럴 수 있다며 철석같은 약속을 이미 오래 여러 번 했었다. 자꾸만 게임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 당분간 게임 시작 시간과 종료시간을 기록하면 어떨까?"라는 제안에 아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스타워즈 광선검쯤은 저리 가라 였을 만큼 강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그런 걸 왜 만드냐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또 속아 넘어가 주기 일등인 아빠는 그럼 스스로 잘해보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한 게 2주 전이다. 그때의 일은 하얗게 잊은 건지 이번엔 10분에서 30분 넘어서는 대담함을 보였다. 늘어지게 낮잠을 잔 남편은 우리 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래 아들에게 결국 게임 금지라는 페널티를 줬다. 남편이 아들에게 내린 가장 큰 중형으로 볼 수 있다. 엄마가 늘 하는 잔소리의 무게감과 다른 게임 금지 결정에 의외로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조금 어색한 주말이 그래도 지났다.
다음날 오후 아들이 불러 세운다. "엄마, 내가 그때 게임시간 못 지키면 엄마가 하는 방식대로 한다고 했는데 왜 게임을 못하게 하느냐!"라고 따져 들었다. 그런 약속을 했었는지도 솔직히 난 모르겠다. 물론 남편도 모른다. 우리는 기억 속에 지웠지만 본인은 그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네가 한 약속은 철석같이 지켜지길 바라면서 엄마 아빠의 약속은 매번 저버리냐고 유치한 말다툼이 살짝 오갔다. 적어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네 입으로 게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반성은 하고 있는지 무엇을 잘 못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게임시간을 어긴 것보다. 자신을 속이고, 엄마 아빠를 속인 그 행동이 잘 못된 거라고 여러 차례 말해 주었다. 아들은 알겠노라 대답했지만 눈빛은 언제 게임 풀어줄 거냐고요! 하는 외침이 가득해 보였다.
"난 반성하고 있는데 아빠 엄마가 내 마음을 못 알아주면 어떡해?"
"아빠, 엄마는 네 마음 다 알아"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럼 아빠가 엄마가 너 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알아? 그런 거랑 비슷해 다 알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지만 이미 눈물로 콧물로 만신창이 된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날도 덥고 해서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부모라고 자식의 마음을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아빠의 행동을 봐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눈치로라도 알아야 한다. 남편은 안쓰러워 다시 지켜지질 못한 그 약속을 다시 하며 조만간 금지 명령을 풀어줄게 뻔하다. 12년이나 같이 산 아들은 아직도 감이 없는지 굳이 게임 이야기를 다시 꺼내 잔소리를 듣는다. 아직 미숙하니까 그렇겠지 생각이 들다가도 한 번씩은 아니다 싶다.
언젠가 tv에서 "아이들은 현재, 지금 이 순간만 살아간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른들이 아무리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 이야기해줘도 아이들은 이 순간, 지금 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맞는 훈육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에 크게 공감하면서 가끔 공부하기 싫어할 때,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들의 대부분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그림이다. 우리 조차 경험하지 못한 무한한 공간 그 너머를 아이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니, 어쩌면 그건 우리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가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냐고 물으면 "너희가 하는 일이 진정 원하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이었으면 좋겠어"라는 교과서 같은 말을 아직도 우린 하고 있다. 한 번은 남편이 아들이 대중음악 한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라고 묻길래 1초의 망설임 없이 반대를 외쳤다. 안 그래도 부유하지 않은데 가난한 음악가는 싫으니까.. 그럴 때는 남편에게 말한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선까지 밀어줄 수 있는 가정하에는 가능하지. 난 가난한 대중음악가는 싫어"라며 결국 꿈과 현실 사이의 조합을 놓고 남편에게 그 짐을 지워 버린다.
솔직히 아들의 마음을 알 길은 없다. 그리고 아직 미숙한 저 아이가 큰 반성을 할 거라는 기대도 많이 하진 않는다. 적어도 이제는 스스로 한말은 책임져야 할 시기는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 중형은 조금 무겁게 받아 들고 가고 싶지만, 일주일에 딱 2시간 30분이라는 그 꿀의 시간을 오래동안은 못 뺏을 듯싶다. 저맘때 아이들에게 게임시간은 목숨만큼 소중할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진심으로, 자신이 한 말에는 자신이 책임지며 살아가는 아들로 성장하면 좋겠다. 게임이 너무 좋아 못하게 될까 봐 눈물 한 방울, 두 방울 거기에 코까지 흘리는 아직 귀여운 12살 아이에게 과한 짐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