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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Dec 30. 2023

먹이로서의 인간

<본즈 앤 올>(Bones and all)


욕망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늘상 '나'의 손바닥을 벗어나 도망가 버리므로. 게다가 정체도 모호하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그래서 '너'를 파괴해버리고 만다. '나'도 모르기에 그것이 어디를 향해 뻗어나갈지 모르는 탓이다.


<본즈 앤 올>의 주인공 매런(테일러 러셀)은 늘 허기지다. 그것은 인간의 살을 베어 물고 내장을 파먹은 뒤 입가의 피를 소매로 닦으려는 순간에서야 겨우 가신다. 그리고 허기는 당연히 다시 찾아온다. 인간의 피와 살을 먹고 싶은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반복된다.


이렇듯 식인의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영화는 "이터"(eater)라 명명한다. 이터이기에 매런은 늘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진 아버지는 열여덟 딸을 홀로 두고 사라진다. 아버지의 빈자리에는 그가 녹음해 둔 테이프만 덩그러니 남았다. 매런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듣고 홀로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 길 위에서 또래의 이터인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고 둘은 같은 욕망 속에서 또 다른 욕망을 잉태한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버려지고 잊힌 두 존재가 마주하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으스스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지금까지 먹어 치운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해 가지고 다니는 설리(마크 라이런스)의 언캐니한 모습처럼 그들의 사랑에는 늘 위험과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 익숙하지만 낯선.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런 세상 속에서 서로를 갈망하며 망가져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려나.


먹는 행위는 인간이 자궁에서 나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뱃속의 아기는 문자 그대로 어미를 먹음으로써 자란다. 다른 존재의 살을 먹지 않고서 인간은 살 수 없다. 그것이 제 살에 뒤엉키기를 멈추는 것은 죽음 후에나 가능하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생명체는 자기 밖의 무언가를 물거나 뜯거나 집어서 삼켜야 한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하고 소화액을 분비시킨다. 인간 몸의 중심축도 온통 소화 기관들인 걸.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본능이라고 부르지.


<본즈 앤 올>에서 이터들에게 식인은 본능의 영역이다. 그들은 인간을 보고 침을 흘린다.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다른 것을 먹어도 생존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을 보고 침이 꿀떡 넘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면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너'의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입 안에 물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너무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깨물어 버리고 싶다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간혹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기꺼이 망가뜨린다. 그래야만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것 마냥. 다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말이다. 소유욕은 폭력을 동반하고 이때의 폭력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터의 식욕은 타자와의 완전한 합체다. 가질 수 없는 혹은 불가해한 대상을 향한 자연스럽고도 기이한 욕망. 욕망은 언제나 성취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법이니.


그러므로 식인은 파멸적이다. 동시에 궁극적이다. '너'를 온전히 '내' 안에 받아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너'와 합일되기 위해 '나'는 '너'를 씹고 삼켜서 망가트릴 수밖에 없다. 이 파괴적인 행위가 '너'를 완전히 '내' 안에 들이게 하는 아이러니. 영화 속 이터들의 욕망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기 밖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불가능함을 가능케 하려는 욕망이 식인으로 배태된다.


오랜 옛날 어디선가의 식인 풍습도 그러했다. 적을 죽이고 그 우두머리를 먹은 것은 그 힘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온전하게 제 몸으로 흡수시키는 것. 이로써 나뉘었던 두 가지는 하나가 되고 전쟁은 평화로 전환되며 죽음은 삶 속에 기입된다. 음식이란 실상 사체니까. 먹는다는 것은 죽음을 삼켜 삶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니 입안의 죽음의 맛은 삶의 향으로 변신해 산 자의 피와 살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는 결국 타자의 자기화에 불과하다. '나'는 살고 '너'는 죽으니까. '너'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는 다시 돌아오니까. '나'의 위치를 고수하는 이상 이 허기와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너'는 계속해서 대체됨에도 '나'는 그대로이므로 이해는 결코 완전히 달성될 수 없다. 하염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설리의 머리카락 덩어리들처럼. 뼈까지 다 씹어먹는다 한들 (이걸 일러 "bones and all"이라고)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


그래서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은 '너'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나'로 하여금 '너'에게 먹히고자 하게 만든다. 너의 욕망에 기꺼이 나를 내어줄 때, 그제야 욕망은 사랑이 되고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설리와 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닌 설리는 결코 스스로를 먹이로서 내어주지 않았다. 리는 매런에게 자신을 준다. 자기 몸을 먹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렇게 사랑은 피칠갑 속에서 온전해졌다. 비록 울음과 슬픔으로 얼룩졌지만. 본래 사랑이 그런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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