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나를 잃지 않기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20대 초반에 가장 많이 하던 고민이었습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한정된 시간 속에 어떻게 사는 게 최선일까? 방법을 모르겠어서 대학생 때 자기계발 도서를 50권 가량을 닥치는 대로 읽고 20대에 꼭 이루어야 할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작성했어요.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나홀로 미국 횡단 여행. 총기있는 나라이고 위험해서 안된다는 아빠에게 A4용지 10장 분량으로 '내가 꼭 미국에 가야하는 이유'로 설득하고 방학마다 삼촌 도매 의류매장 알바를 하면서 자금을 모았어요.
대학교 졸업식 날 미국으로 떠나 서부 LA부터 시작해 뉴욕까지 35개주를 여행했고, 혼자 가기 힘든 지역은 다국적 배낭여행자들이 모여 밴을 타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트렉 아메리카를 이용했어요. 미국의 곳곳을 유럽의 친구들과 함께 경험하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떠나 문화교류와 자신감이라는 커다란 자산이 되었습니다.
사막에 누워서 별 보며 캠핑하던 추억, 유타주 모뉴먼트 밸리에서 인디언 음식을 먹고 인디언이 북을 치며 전통 노래를 하는 가운데 동그랗게 모여앉아 명상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당시 인디언 노래에 감명을 받아 나도 한국의 전통 음악을 들려주겠다며 북을 두드리며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한국인의 한을 담은 아리랑을 20대 초반이라 동요처럼 불렀는데도 인디언, 독일, 캐나다, 일본, 미국, 프랑스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주면서 그 뒤로 각자 자기나라 민요를 부르며 더욱 끈끈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6개월간의 미국 횡단여행이 저에겐 여행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진짜 여행을 여기서 다 경험했으니까요.
20대에 기자가 되는 게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였어요. 그 어떤 직업보다 단 시간에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세상 돌아가는 걸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신문기자보다 10대 때 자주 읽었던 패션지 기자, 에디터가 되고 싶어 인턴부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패션 잡지의 인턴 2명 뽑는데 당시 2,000명이 지원했다고 해요. 2명 안에 뽑혔지만 일주일만에 패션잡지는 저랑은 안 맞는다는걸 느꼈어요.
여행잡지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턴으로 시작했는데 벽 한쪽에 책꽂이 6단짜리 5개 분량의 어마어마한 책들과 디지털 사진 정리가 저에게 주어진 임무였어요. 4개월을 주말도 없이 출근해 사진정리를 하다가 지하철에서 두 번 쓰러졌습니다. 그래도 이걸 끝내면 기자가 될 수 있겠지 했는데 인턴이 끝나갈 무렵에 인턴 3명이 더 들어왔어요. 그 중에 한명을 뽑겠다고.
그동안 격려해주었던 선배 기자들도 황당해 하는데 제가 뭐 힘이 있나요?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관두더라도 뽑히고 관두어야지.'
한명은 제가 4개월 동안 했던 사진 정리를 5시간만에 그만두고 나갔고 한명도 한달 후에 그만두고 마지막 한명은 문예창작과 나온 글 잘 쓰는 친구에다 편집부장님이 대학 같은과 선후배라며 챙기는게 눈에 보여서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어요.
사진 정리 4개월간 나는 끈기를 배웠다. 끈기 그거 하나면 된다.
속은 상했지만 젊고 20대니까.
어느 날, 부장님이 둘을 불러 카메라 하나씩 주고 취재를 다녀오라고 시킵니다. 뭘 해야할지 하나도 안 가르쳐주고 말입니다. 다녀와서 기사작성을 하는데, 그 친구는 '선유도의 낮과 밤'이란 주제로 사진도 잘 찍고 글도 너무 감성있게 잘 썼어요.
저는 '충북 제천의 산수유마을' 체험 취재를 갔어요. 30팀의 가족이 체험에 참여하는 과정이라 이틀을 내내 취재하고 사진도 만장은 찍어왔는데 그 친구의 기사를 보고 '졌다. 이제 난 뭘하지?'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부장님이 또 둘을 호출합니다.
먼저 그 친구에게 "너는 글을 잘 쓴다. 근데 꾸며서 쓴다. 기자는 사실을 써야한다. 너는 소설가가 더 맞겠다".
?????
저에게는 "기자들이 취재하기 바빠 아무도 정리 못했던 공간을 정리시켰다. 고생했다. 주말에도 정리하라고 일 시켜놓고 땡땡이 쳤을까봐 내가 와봤는데 온지도 모르고 노래부르며 혼자 정리하더라. 4개월간 모두가 너를 지켜봤다. 선배기자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봤다. 글도 꾸미지 않더라. 만장일치로 모두 너를 뽑았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잘 해라."
솔직히 기쁘지는 않았어요. 너무 힘들었기에. 4달간 마음속으로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랩을 하며 일한걸 부장님은 모르시죠. '고생했다' 이 한마디에 눈물이 줄줄 나옵니다. 말의 힘이 이렇게 크답니다. 그동안 힘든걸 알아주는 그 고생했다 한마디에 그만두려던 마음을 접고 본격적으로 여행기자로 업무를 시작합니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구석구석 흝으며 나라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더불어 출장으로 짐싸고 풀고 목적지에 가기 전 정보 검색 하는 능력이 업그레이드 되었구요.
한달의 반은 출장지에 있었기에 내가 현재 활동하는 지역의 경계가 없는 삶이었어요. 20대의 한창을 여행잡지 기자로 근무하다 20대 끝자락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어요.
에너지가 많으니 아이도 잘 키울 수 있을지 알았어요. 육아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책으로 배운 육아랑 현실은 달랐죠. 아이가 울면 허둥지둥 뭘 해야할지 모르겠고 기저귀랑 먹는게 해결되었는데 왜 울지? 우는 아이를 안고 나도 울고.
실컷 넓은 세상 돌아다니다 아이와 단둘이 집에 갇힌 느낌이 들고.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데 나는 잠이 부족하고 제때 먹지 못해서 피부는 푸석푸석, 머리카락은 왕창 빠져서 잔디머리가 나고 다크써클도 생기고 점차 생기를 잃어갔어요.
글 쓰는 걸로 육아 스트레스 풀어보려고 그때 당시 블로그를 개설했는데 앉아서 타자좀 두드릴만 하면 응애 울고 밥 주고 응가 치우다 보면 저녁에 써야지 하고 미루다가 목욕시키고 아이를 토닥토닥 재우려다 먼저 코골고 자기 일쑤. 그렇게 둘째의 육아까지, 삼십대는 육아하다 끝난거 같아요.
큰 아이 8개월에 주말부부가 되어 8년동안 아이 둘 독박 육아를 했으니까요. 아이 둘을 15개월까진 내손에서 키우고 어린이집에 보내자 생각하고 둘을 잠시 기관에 맡긴 순간부터 곧바로 일을 시작했어요.
출장이 잦은 여행기자로는 돌아갈 수 없고 미국 유학을 다녀올 때 결혼 이후를 염두에 두고 테솔을 따두어서 신혼때부터 영어강사로 일을 해두었던 터라 어린이집 보낼 땐 대형 유치원 영어 특강 강사를 했어요.
2시간동안 6개 반을 돌며 수업을 하고 각 반마다 영어노래, 그달의 주제에 맞춰 대화를 알려주고 퀴즈내고 게임하고 그렇게 6개반을 돌면 지치기는 커녕 힘이 솟았어요. 역시 나는 활동을 해야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구나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점차 커가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유명 어학원 강사로 10년 이상을 꾸준히 일을 했습니다. 어학원은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 있어요. 여름은 3~4일, 겨울은 5일 가량인데 주말을 앞뒤 붙이면 최대 열흘을 쉴 수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원어민 선생님들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충전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들도 방학 중 가족들과 여행다녀오며 휴식을 취하는 기간이기도 하지요.
워킹맘인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흘. 그래서 열흘살기를 시작했어요.
저도 남편도 회사에서 휴가가 정해져 있는데 날짜가 맞지 않아서 엄마 혼자 아이둘 여행이 되었답니다. 정말 힘든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나에게 자양분이 되더라구요. 독박육아를 하며 눈물로 켜켜이 쌓인 시간들은 어느새 아이둘 육아의 달인이 되어 있었고 둘을 데리고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친구들이 많이 묻더라구요. 짐 들어줄 남편도 없이 혼자 애 둘 데리고 가는게 무슨 여행이냐고. 그건 고행이라고. 집에서만 고생하지 나가서까지 고생하고 싶지 않다고.
고행_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하여 수행을 쌓는 일. ex)석가모니의 고행
맞습니다. 때론 고행이기도 해요.
하지만 일 년에 딱 열흘. 독박육아로 고생한 나를 위해 박차고 나가보기로 했어요. 집 대문을 벗어나니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졌어요. 긴 터널의 어둠속에 있다가 빛을 본 느낌. 새처럼 훨훨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20대의 나를 만난 기분을요. 어깨에는 아이 짐과 양 손에는 아이 손이 하나씩 쥐어져 있다는 걸 빼면요.
물 만난 고기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던 20대의 내가 아이들과 보폭을 맞추느라 발걸음은 느려졌지만 열흘살기 여행을 하며 그렇게 세상 속으로 천천히 한발 한발 다시 내딛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흘살기 여행은 시작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