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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흘살기 전문가 Dec 18. 2024

열흘살기 여행의 시작 아이와 제주도 여행

배 타고 제주로






나에게 여행이란 새로움이다.

익숙함을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진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우당탕 부딪혀 보기 위해 세상을 더 넓게 보고자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이 7살, 4살이 되어 둘째가 식당밥도 먹을 수 있게 될 때 이제 열흘살기 여행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새로움이라면 아이들에겐 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게 여행의 목적이다.



아빠까지 다 같이 해외여행은 태국, 다낭이 전부였고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끼리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제주 열흘살기 여행을 계획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본 적은 있어도 배를 타고 가본 적은 없기에 아이들에게 비행기 말고도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완도에서 쾌속선을 타고 제주를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전날부터 날이 궂더니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완도항에서 출발 시간이 조금 지연되었다. 강풍이 심해 배가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차하면 하루 더 자고서라도 배로 들어가 보려고 조금 대기했더니 20분 만에 배가 정상 운행한다고 해서 승선을 했다. 나도 배 타고 제주는 처음이라 너무 설레었다.



완도에서 제주까지 2시간 40여분. 우리는 오후 3시에 실버 클라우드 호 다음으로 큰 대형 페리인 블루펄을 탔는데 사람은 800명 이상, 차는 300대 이상 선적 가능한 아주 큰 배였다.



거대한 블루펄에 승선하니 안에 카페도 있고 안마의자로 된 좌석도 있었다. 안마의자 좌석은 등치 큰 외국인들 차지이고 우리는 카페 바로 앞에 앉아 간식을 즐기다가 바깥을 보여주려고 자리를 옮겼다.






배가 흔들흔들 파도에 휘청이다가 외부로 나가니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바람이 불어서 아이 둘을 데리고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높은 파도와 강풍에 놀란 아이들을 안심시키려고 배를 타고 가니 바다도 보고 간식도 먹고 돌아다녀도 되고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가는 장점에 대해 하나씩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명 큰 배라서 뱃멀미도 별로 없을 거라고 어제 표 끊을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옆에 아빠, 엄마, 아들 둘이 앉아있고 뒤에도 아이 둘을 동반한 가족이 앉아있는데 아빠 한 명이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다가 제대로 못 걷고 고꾸라졌다. 뒤를 이어 화장실을 가려던 옆에 있는 아이 아빠는 좌석에서 일어나다 중간에 토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큰 배도 파도에는 속수무책이구나. 바깥 강풍은 어찌나 세었는지 바람소리가 창문을 뚫을세라 무섭도록 크게 들렸다. 짐들은 여기저기 날아가고 사람들은 각자 좌석을 붙잡고 있었다. 배가 요동을 치니 나도 몸이 좌석에서 튕겨져 나갈 것 같아서 두 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제발 이 강풍이 멈추기를, 제주까지 빨리 도착하기만을 마음속으로 바랬다.


배 타고 청산도, 생일도로 출장을 몇 번 가보았고 부산에서 배 타고 일본도 가보았기에 배는 이동수단일 뿐, 쉽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날씨의 영향을 어마어마하게 받는 게 바로 배였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려니 식은땀이 났다. 내가 화장실을 가게 되면 아까 아저씨처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고꾸라질 것 같고 아이들은 좌석에서 튕겨져 나갈 것 같은 폭의 파도였다.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울렁거림과 메슥거림의 싸움이었다. 겨우 참아내고 놀라서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파도가 잔잔해졌고 이제 제주에 도착했나 보다 생각할 때쯤, 둘째가 나에게 분수토를 하고 말았다.




대충 닦고 배에서 내려야 해서 두 아이 손을 잡고 짐을 들고 배에서 내리니 그동안 힘듦을 참았던 큰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배 안타. 엉엉"

방금 토했던 둘째도 따라서 운다.

"나도 배 싫어. 으앙"




방금 전까지 울렁거림을 참아냈던 성인들도 얼굴이 다들 하얗게 질려서 내리면서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웃는데 나는 웃음이 나질 않았다. 어질어질. 옷은 토사물로 젖어있고. 내가 추구하는 여행의 새로움이라면 정말 새로운 영역이다. 다신 경험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2m 파도의 울렁거림.



배가 너무 싫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린 세 모녀의 열흘살기 제주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제주 함덕이다. 제주 여행을 여러 번 다니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길게 제주에 묵는다면 꼭 함덕에서 지내고 싶었다. 종일 모래놀이를 할 수 있을 만한 고운 모래사장. 아이들도 가볍게 산책할 수 있을 야트막한 서우봉, 옹기종기 해변가를 따라 있는 작은 카페와 음식점들, 중문관광단지처럼 너무 관광지스럽지 않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함덕. 2018년도의 함덕은 그랬다.




어린이 해장국에 밥 먹이고 숙소에서 씻기고 조금 쉬다가 나온 함덕 바다.

모래놀이를 하던 큰 아이가 써 놓은 글씨.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물 둘을 낳고 키워서 셋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엄마도 감사해.

오늘 너희들의 인생 첫 배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아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나의 30대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눈 한번 깜빡이니 어느덧 삼십 대 중후반이 되어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꾸준히 일을 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삼십 대에 이룬 게 없다는 자책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에서도 견고한 나의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가정과 육아와 병행하느라 뭔가 어정쩡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워킹맘도 완벽한 전업맘도 아닌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고민하던 즈음 떠난 여행이었다.



누워서 울기만 하던 신생아에서 아이들은 걷고 뛰고 곧 학교를 가는데 나는 어떤 게 나의 길일까를 끊임없이 고민 또 고민.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느라 몸은 여행을 하는데 정신은 그렇게 즐기지 못했다.



신나 하는 아이들과 다르게 그 당시 치열하게 고민하던 나는 아이들과 함덕의 거리를 걷다가 나도 모르게 나의 생각들을 함덕의 거리 곳곳에 뿌렸다. 함덕의 해수욕장에 함덕의 델문도 카페에, 대명 리조트의 고깃집에, 서우봉 언덕에, 모래사장에 바닷바람에 날려버리니 어느새 정신이 개운해졌다.



지금도 함덕을 가면 내가 거리 곳곳에 뿌려두었던 생각들이 남아 그 당시의 나를 반추하게 된다. 젊고 애 띄고 미소가 밝은 그 당시의 나. 그리고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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