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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대생 무씨 Jul 22. 2020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07/20] 비판을 수용한다는 것과 비난을 감내한다는 것.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듯,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역시
듣기 좋은 칭찬보다는 듣기 싫은 쓴소리이다.

                                                                                                  - 비판을 수용한다는 것. 중에서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결점을 지나치게 까내리거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쓴소리들도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옆집 XX는 너보다 훨씬 ~하더라', '너는 잘하지도 못하면서 그건 왜 하니', '내가 널 잘 아는데,~' 등 우리의 최측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오기도 하고, SNS 상에서 익명성 뒤에 숨은 키보드 워리어로부터 오기도 한다. 이러한 얘기들은 우리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위축시키고 도전을 꺼리게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틀 전《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최근 이슈가 된 미투 운동, 직장 내 성추행, 동성애에 대한 편견 등을 다루었고 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중 하나인 FOX 뉴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했기에 더욱 살로 와 닿는 느낌이었다. 극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로저 에일스가 성추행을 한 여성들에게 내뱉는 말들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성희롱적인 발언보다 대중, 미디에 대한 조언을 빙자한 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누구를 욕하고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가 딱 드러나는 드라마나 영화의 세계와 달리 현실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훨씬 더 많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비판이고 어떤 것이 비난인지 그 경계선 역시 모호할 때가 많다. 엄마가 자신의 자식의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해 진로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것은 조언일까 온정적 간섭일까? 목적만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선한 조언이고 새겨 들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공대생의 꿈을 품고 있는 자식에게 자꾸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의사의 길을 걷기를 바라며 다 널 위한 조언이라고 한다면? 또는, 비혼 주의자 여성에게 명절마다 관심을 기울이며 시집은 언제 가고, 자녀는 언제 낳을 거냐고 은근슬쩍 압박을 주는 가족이라면? 어디까지를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NO'라고 외쳐야 하는 걸까?  영화 속 로저 에일스에게 성추행당한 수십 명의 여성들이 그 자리에서 'NO'라고 외치지 못한 것에도 이러한 모호함이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모호함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야 할까? 내가 찾은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다른 의중 없이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큰 모욕감으로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은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사고하고 나에게 들어오는 말과 나로부터 나가는 말을 통찰해야 한다.


그 시작이 내 주위의 '문화' 혹은 '관습'으로 자리 잡은 것들에 대해 한번은 의문을 품고,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점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이 창의력을 저해한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고정관념'은 우리 삶에 불필요한 선택을 줄이는 순기능도 있다고 생각한다. 창의력 하면 떠오르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검은 목티에 청바지만 고집한 것도,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같은 티를 매일 돌려 입는 것도 그들의 '고정관념'이다. 다만, 자신 또는 남의 발전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고정관념'이었기에 이것이 찬사를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리가 '주의'해야 할 고정관념은 자신 또는 남의 발전에 위해를 끼치는 관념 들일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로저 에일스의 조언을 빙자한 발언들은 설령 그가 행위 자체를 취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도, 여성을 매체의 성상품으로 취급함으로써 언론인으로 기능을 해야 할 여성들의 발전에 위해를 가한 것이다. 또한 내가 예를 들고 제목으로 내세운 '다 너 잘되는 소리야'라고 단순히 안정적인 진로를 자녀에게 권하는 부모의 경우, 자녀의 잠재력을 저해하는 것이기에 비록 그 의도가 선할지라도 충분히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 보다 더 구별하기 어려운 '쓴소리'들이 많다. 의대 내의 문제 하나를 들자면, 한국 병원과 의대 내에서는 단정한 복장이 '문화'처럼 자리 잡혀 있다. 병원이 아닌 의대 수업 때에도 슬리퍼를 신거나 반바지를 입는 것을 단정하지 않은 복장으로 교수님께 직접적으로 지적을 받기도 하고 당연히 병원 실습을 돌 때는 염색 금지, 청바지 말고 검은 슬랙스와 단화 착용 등 마치 엄격한 중고등학교를 연상시킨다. 이것도 그나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완화가 된 것인다.(*예전에는 반바지를 입고 학교를 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환자를 진찰 및 치료할 때 방해가 되지 않는 적절한 복장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직업윤리이겠지만, 염색을 하거나 수업을 올 때 슬리퍼나 반바지를 착용하는 것은 지적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예과 무씨 때에도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러한 불문율을 지키는 것이 환자에게 신뢰를 얻기 쉬운 인상착의이고, 생과 사를 오가는 환경 속에서 보다 정숙한 차림을 갖추는 것이 예의라는 논리였다. 사실 나는 염색에 특별한 생각도 없고, 슬리퍼나 반바지를 즐겨 입는 편은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나의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면서 이 역시도 '의사는 검은 머리에 검은 바지와 검은 단화를 착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단순히 '빨간 머리의 의사는 보기 힘들다'는 이유가 의사가 빨간 머리 대신 검은 혹은 갈색 머리를 고수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반바지는 살갗이 노출된다고 쳐도 청바지는 작업복으로 손색이 없는데(*유래가 작업복인 옷인데..!) 검은 슬랙스보다 덜 단정해 보인다는 이유로 가운 아래에는 반드시 검은 슬랙스를 입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음... 어떤 답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계속 인식하고 의문을 품고 갈 생각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도움이 되는 쓴소리를 받아들이고 해가 되는 쓴소리에 대해 'NO'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의문을 품고 사고를 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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