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치 천 번째 다짐이었다. 아니, 삼만 육천 번째 다짐이었나? 나는 세지도 못할 만큼 반복해 왔던 다짐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되풀이했다. 과음한 다음 날의 나는 마법의 주문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례처럼 금주를 다짐했다. ‘진짜 술 안 마신다.’라는 이 짧은 문장에서 ‘진짜’를 못 지키는 걸까 ‘술 안 마신다’를 못 지키는 걸까. 한바탕 후회와 다짐을 되뇌다 혀 안쪽에서 거북스럽게 느껴지는 어렴풋한 단맛이 거슬렸다. 분명히 꿀떡꿀떡 삼킬 때만 해도 입맛을 돋우던 소주의 단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찝찝한 뒤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양치를 해야겠다. 직전에 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다짐을 새겼으나 그 몇 걸음 앞의 화장실이 마라톤의 결승지점처럼 아득하다. 일어나기 싫어서 침대 위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자 두개골 안에서 반쯤은 부양해 있는 듯한 뇌도 함께 이리저리 구르는 느낌이 난다. 그래도 해야지. 양치는 해야지. 단순한 가락의 시조를 읊으며 몸을 겨우 일으킨다. 말 그대로 천근만근. 안 그래도 현실적이라고 정평이 자자한 화장실 거울 속에 이보다 더 동그랄 수 있을까 싶은 동그란 얼굴이 이렇게까지 부어도 될까 싶게 부어있었다. 웃기게도 생겼다. 내 얼굴을 합당하게 비웃을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사람인 내가 신랄한 한줄평을 남긴다. 그리고 이제, 하루에 주어진 숙취를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차례다. 양치질. 그 일상적이고도 쉬운, 수십 년을 갈고닦았으며 ‘전동’이라는 고급 장비까지 갖춘 루틴이 내 숙취 가늠의 첫 관문이다.
숙취. 숙취라 함은, 이기지 못할 술을 이기지 못할 만큼 마신 내가 다음날 근육통, 두통, 복통, 구토 등의 쓸데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알코올에 고문당하는 것을 말한다. 숙취의 가장 악랄한 점은, 다시 오지 않을 어제의 즐거운 술자리와 조화가 끝내줬던 안주와 술의 맛을 오늘의 통증으로 깔끔히 잊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숙취를 한 번이라도 겪어본 음주가들은 십분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괴로울 바에는 내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든, 그동안의 술자리가 얼마나 즐거웠든, 이 지독하고 진절머리 나는 알코올자식과 영원히 이별하겠다고 다짐하는 과정을 말이다. 숙취는 음주의 가장 큰 적이고,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알코올 동지들과 즐거이 어울리던 나는 숙취의 공격 앞에 쉽게 변절한다. 갖가지 고통을 겪으며 속 안의 것을 모두 쏟아내 버린 나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참회한다. 그리고 음주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아리따운 청사진을 그린다. 그 청사진의 제목이 바로 “오늘부터 진짜 금주한다.”가 되는 것이다.
칫솔 위에 적당량의 치약을 짜내려 입을 넣는 이 느릿한 과정에 은근한 긴장감을 느낀다. 양치질을 멀쩡하게 마친다면 그날의 숙취는 견딜만한 것이 되고, 혀를 구석구석 닦다 작은 헛구역질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죽음의 오바이트 레이스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관문이 자연스레 열린다. ‘백곰을 절대로 떠올리지 마세요’하면 머릿속에 자연스레 백곰이 더 떠오른다는 역설 효과의 임상 실험에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된 나는, ‘구토를 하지 않아야 해.’라고 생각하자 괜히 작은 헛구역질이 치닫는다. 그때부터는 마인드 컨트롤 싸움이다. 양치를 한 번 더 하는 건 너무 귀찮잖아, 아직 해장을 안 해서 토할 것도 없어, 토하면 식도 다 망가진다 등… 꽤나 효율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위장을 다독이자 위장이 메슥거림을 잠시 멈추고 못 이기는 척 해장이라는 기회를 준다. 이때 주의할 점은 메슥거림이 멎은 잠깐의 순간에 갈증이 난다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짓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편한 심기를 꾹 참고 있던 위장이 “어? 너 해장하라고 시간 줬는데? 지금 나한테 물을 먹였어? 나 죽을게.”라며 갑작스레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변기통을 붙잡고 참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는 배우지도 않은 염불이 외워진다. “내가 더 이상 술 마시나 봐라. 내가 또 술을 먹으면 개다, 개.” 라는 염불을 108번쯤 외면 몸 안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쏙 빠진 무소유 상태의 내가 침대에 초연하게 누워있다. 인생은 고통이다, 다들 이렇게 탐욕에 대한 해탈을 하고 열반에 드는 건가. 문득 깨달음을 얻는 것도 잠시,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역시 금주뿐이다.”라는 아침의 삼만 육천 번째 다짐에 힘을 싣는다.
그렇다고 금주를 하겠다는 다짐은 비단 숙취를 피하기 위한 일차원적인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주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짐된다. 단지 요즘 좀 피곤한 것 같아서, 건강검진을 앞두고 있어서, 건강검진 결과에서 술을 줄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금주를 권해서, 살이 너무 찐 것 같아서, 술 마시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서, 술로 인해 일처리가 능률적이지 못한 것 같아서……. 때로는 작고 때로는 큰 이유로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몇 달 동안 금주를 다짐하고 실천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세워지고, 지켜지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는 다짐들 중에서 금주만큼 지키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술 끊는 사람들 상 줘야 해.” 하면서 수상 단상에 오르는 나를 진정으로 상상해 본 적이 있었나?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일단 누울 자리를 살피기에 급급했던 나였다.
물론 금주를 다짐할 때의 그 마음가짐은 언제나, 누구보다 진실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술과 안주와 술자리를 모두 좋아하는 나지만, 술이 몸에 해로운 것도 알고(적당히 마시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거나 아픈 부위를 소독시켜 준다고 믿고 싶지만) 술로 인해 나의 점잖음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기에, 나의 가장 큰 반려를 비정하게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맘처럼 쉽게만 된다면 알코올의존치료센터 같은 곳이 도시마다 설립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열 명 중 한 명이 음주 후 좌절감을 느끼거나 후회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내가 통계에 응한 적은 없지만 내가 통계조사에 응했다면 분명히 나 역시도 그 한 명에 속했을 것이다.
금주. 나에게는 이 두 글자가 왜 이리도 멀어 보이는지. 그래도 일단 숙취 덕분(?)인지 오늘은 술 생각이 전혀 안 난다. 그럼 오늘은 술 안마실테니까, 오늘부터 금주 1일 차! 금주 다짐 아티스트는 이렇게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금주를 시작해본다.
브런치 연재가 익숙치 않아서 개별 발행했던 글을 브런치 북으로 재업로드하여 연재하려 합니다.
사실 글을 쓰는 것, 심지어 연재를 한다는 것, 나의 글을 공개한다는 것... 모든 것이 어색하고 수줍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