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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새진 Oct 27. 2024

2. 금주할 결심

2022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


  <헤어질 결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가 서로에게 깊이 끌리며 관계를 쌓아가지만 결국 헤어질 결심을 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실행에 옮기는 영화다. 영화의 내용적 측면에 대해서는 말할 것 없겠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제목이다. ‘결심’의 사전적 의미는 <할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한다. 살면서 어떤 일은 결심 없이 저절로 실천되기도 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도 결심을 해야만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하며, 결심을 했음에도 결국 해내지 못하는 일도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기어코 결심까지 해가면서 헤어졌고, 나에게 금주란 위에 제시한 선택지를 모두 거친 유일한 사건이었으므로 결론적으론 해내지 못한 일이 되었다. 사실 본격적인 금주를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치만 ‘이 결심이 언제까지 갈까? 영원하지 않을 거라면 지금쯤 조용히 음주를 재개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 그 마음에 속절없이 져버리곤 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본격적으로 금주를 하겠다는 결심은 제출 마감일을 앞두고 꾸준히 수정되는 과제처럼 최종, 진짜 최종, 이번에는 진짜 최종으로 갱신된다.

  단언컨대 나는 사람들이 알코올 알레르기와 같은 특이 사항이 없을 경우 당연히 주 1회는 술을 마실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보다 술을 더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 2~3회도 마시는 것이고 때때로 자제력을 잃어 폭음을 하게 될 때도 있으니 주 1회 정도는 폭음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과 나의 부모님은 주 1회쯤은 거뜬히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 1회는커녕 월 1회, 아니 아예 음주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놀랄 노자였다. 그럼 드라마, 예능 할 것 없이 등장하는 일상적인 음주 장면은 무엇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인스타그램 스토리 속 술 마시는 친구들은 도대체 누구와 술을 마시는 것이며,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가족들과 먹을 저녁상에 자연스럽게 소주를 꺼내 들고 앉는 나를 부모님은 왜 말리지 않는 걸까?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나만 알코올 아비투스 속에 살고 있는 거야?
어떻게 이 사회에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일 수 있는 거야?
내가 술 때문에 망가질 때, 이 사람들은 그럴 일이 아예 없다는 거야?      


나는 가끔 그런 동경심에 금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체 내가 남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남들을 보고 시작하는 금주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금주할 결심은 술 때문에 어떠한 피해나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거나 더 나아가서는 술이 나의 인생을 파괴한다고 느낀 적이 있었을 때 생겼다.


 27살, 나름 내 일생 최대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냈고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신입의 패기로 주어진 일이 뭐든 열심히 했고, 내가 열심히 한다는 걸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가 아닌 ‘직장에서 살아남기’였고, 당시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입사 3개월 차, 나에게 상사가 무례한 언어로 무리한 요청(을 가장한 명령)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일생의 성과를 이루며 한 단계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했으나 겨우 쌓아왔던 멘탈은 너무나도 쉽게 와르르 쏟아져 내려 바닥을 드러냈다.


 아무튼 그 수모를 당하고도, 나는 어느 유명한 카피라이트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을 몸소 실천하고자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마 그것까지가 신입의 패기였던 것 같다. 진정한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된다. 여행 자체는 정말 끝내주게 행복했다. 끝내주는 여행을 다녀온 것까진 좋았는데, 그 이후 돌아온 현실에 적응을 못했다. ‘분명히 나는 스페인에 있었는데 오늘 내가 왜 대한민국에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고, 매시간 불행했다. 여행지에서는 40도가 넘는 땡볕에서 걷기만 해도 행복했는데, 왜 이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타개책으로 찾은 것이 바로 술이었다. 직장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모든 에너지를 써버리니 퇴근 후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홀로 술을 마시는 것밖에 없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부당한 일을 준 상사를 비난하고,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형적인 알코올 의존증의 전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몇 개월이 되자 나는 꽤 높은 수준의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되어있었다. 처음엔 맥주 한두 캔으로 시작했던 음주가 소주 두세 병으로 늘어났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다 결국 술을 마셔야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당시 6평 남짓 원룸에 살았는데 그 좁은 방에 모든 집기와 소장품이 밖에 나와 널브러져 있었다. 집에 오면 술 마실 기력밖에 남지 않아서 도저히 청소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괴로웠다. 몸은 망가지고 성격은 예민해졌으며 표정은 어두워졌다. 인간관계는 좁아지고, 멀쩡히 좋은 직장 취직해서 혼자 살겠다고 나온 귀한 외동딸이 이렇게 사는 걸 보면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됐다. 그렇지만 그 괴로운 마음을 잊게 해주는 건 오로지 술밖에 없었다. 그맘때쯤 직장 동료들이 나에게 무슨 안 좋은 일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분명 입사하고 몇 개월간은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다니던 애가 다 죽은 시커먼 얼굴로 다니니 걱정이 되었을 터였다. 아마 분명히 술냄새도 났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심각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 직장 내에서 간단한 상담을 받고 그동안 내가 해왔던 행동들이 자기 파괴적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술은 내가 가장 믿는 구석이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담을 받은 후 이렇게 살다간 진짜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술을 끊겠다는 생각보다는 최대한 멀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순적이게도 술을 아예 끊으면 그것도 죽겠다 싶었으니까.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집을 치우는 거였다. 방바닥을 뒹구는 술병을 싹 갖다 버리고 침대를 뒤덮은 옷들을 헹거에 다시 걸었다. 그리고서 최대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혼자 있으면 또 술을 마시고 싶어질 게 뻔했으니까. 그때 시작했던 게 운동이었다. 직업적인 특성상 허리를 많이 쓰기도 하고 술을 하도 먹어서 배가 나오니 허리가 아팠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가벼운 운동을 하라고 하길래 병원에서 나와 백만 원짜리 필라테스 회원권을 끊었다. 말하자면 금주할 결심을 돈으로 산 것이다. 사실 그때는 돈이 얼마가 들든 몸도 마음도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때 다니던 필라테스 센터가 헬스장 안에 있는 구조라 자연히 헬스도 같이 다니게 됐고, 퇴근 후에 운동을 하러 가면 4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러다 보니 도저히 술을 마실 시간이 안 났다. 가끔 친한 친구들을 만나 한잔할 수는 있어도 혼자서 술을 마시는 날이 급격하게 줄어드니 정상적인 패턴의 삶으로 점차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몇 개월간 술 없이는 잠도 제대로 못 자던 사람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을 혹사하다시피 운동을 하니 침대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아 졌고 아프던 허리가 아프지 않아 졌다. 한마디로 나는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


 중간중간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으니 양심상 완벽한 금주라고는 못하겠으나 꽤나 성공적인 절주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주요했던 점은 술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괴로운 일을 술로 털어낸다는 게 꽤 효율적이라고 느낄 때도 아직은 있지만 그 일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다음 주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나서 꽤 오래 운동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운동을 말하라고 하면 필라테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어졌다. 운동에 들인 돈만 해도 몇백만 원인데 놀랍게도 몸짱이 되지는 못했다. 운동깨나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본다는 그 흔하디 흔한 바프(바디프로필) 사진도 한 장 없다. 그치만 매번 갱신되는 금주할 결심 속에 <술은 나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주지 않으며 술은 절대 회피의 방법으로 선택되어선 안된다.>라는 절대 변치 않는 마음의 명제 하나는 확실히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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