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라는 부사는 사용 시 큰 위험성이 수반된다.
‘역시’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이미 단정지은 상태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사용한다. 그래서 ‘역시’에는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역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가끔은 두렵기까지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독자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문장을 보면 어떤 상황이 떠오르는지 묻고 싶다. 나는 자연스레 내 수많은 금주 선언과 번복을 떠올린다. 내가 주변인에게 금주를 선언했을 때, 주변인의 반응은 거의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첫째, 언제까지 안마실 건데?
둘째, 그래. 좋아. 네가 술을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보자.
첫 번째는 대체로 나와 술 모임을 꽤 자주 갖는 주변인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진작에 나를 “완전 금주”(남은 인생을 전혀 술 없이 살아가는 것) 실패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주를 선언하는 나를 공수표 남발하는 선거철 정치인 정도로 생각하고 내 말에 크게 동조하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 반응에 “아, 그래도 시작한 김에 금주를 제대로 해보려고.”라고 답한다면 본인들도 절주나 금주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있어 나의 금주 동기를 묻고 응원을 해주는 등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잦다. 나는 이들을 ‘목적론적 반응군’이라 명하고 싶다. 이들은 결과적으로는 내가 금주에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술을 이만큼이나 좋아하는데 금주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로 지지의 목소리를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응원에는 함정이 있는데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술자리를 기획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까지”라는 기한을 정함으로써 간을 조금이나마 리프레쉬한 나와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그 계획에 살짝쿵 넘어가주는 것이 나만의 인지상정이 되었고, 그것은 이들의 생각대로 내가 결국 “완전 금주”에 실패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술을 잘 즐기지 않는 주변인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대체로 술이란 회식에서나 억지로 먹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맛없는 걸 왜 돈 주고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겪은 술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제시하며 금주를 주장하는데, 그들이 겪은 부정적인 경험이 내가 그들에게 부렸던 술주정일 경우 주장은 더욱 강력해진다. 나는 그들에게 사과를 덧붙이며 의지를 내보인다.
“그때 그건 진짜 미안해. 나 2주 동안은 진짜 술 끊으려고.”
“2주? 그게 술을 끊는 거야? 잠시 쉬는 거지.”
“주 3회 먹다가 월 2회 먹는 거면 거의 끊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못 끊을 줄 알았어.”
나는 이런 대화 패턴을 보이는 두 번째 반응군을 ‘결과론적 반응군’이라 칭하겠다. 이들은 나의 “완전 금주”만을 금주로 인정하는데, 최종적으로는 내가 술을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내게 말하는 ‘역시’가 가끔은 나의 한계점을 고작 술 마시는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음주는 줄여야 하는 습관이 맞다. 술을 마시면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각종 성인병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우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각자의 취향이 있을 뿐이고 과하면 독이 되기에 스스로 조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론적 반응군의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은 언제나 훈계와 질책에 가깝다. 사실 내가 금주하는데 들인 건 내 결심뿐인데, 내 결심에 십 원 한 장 보태주지 않은 사람들이 왜 내 금주 도전 자체를 재단해 버리는 걸까. 사실 내 금주 목적은 어쩌면 완전히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맛있는 삼겹살 한 쌈에 곁들이는 소주 한잔의 짜릿함을 조금이라도 더 건강히, 또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나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외치고 싶다.
“역시 삼겹살엔 소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