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랫동안 나의 의지로 ‘술을 끊었다’ 싶었을 때는 큰 병원에 드나들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거의 완치되어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어졌지만, 우연히 어떤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 죽음 수용의 5단계를 한 달 안에 고속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미리 얘기하지만, 술 때문에 생긴 병은 아니라고 단언하기에 습관성 음주자들은 내가 아팠다는 말을 경계하지 않아도 좋다.
3년 전쯤, 갑자기 생리불순이 생겼다. 여성 독자들이라면 알 것이다. 정확히 들어맞던 생리주기가 한 번씩 삐끗하기만 해도 느껴지는 그 쎄함을. 원래 달에 한 번씩 때 되면 꼬박꼬박 하던 생리를 두 달에 한 번씩 겨우 하더니 갑자기 주기가 1주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한 달이 4주라고 치면, 첫째 주는 생리 준비를 하며 생리 전 증후군을 치르고, 둘째 주는 생리를 하고, 셋째 주에 또 생리 전 증후군을 치르고, 넷째 주에 또 생리를 하는 극악의 비효율 생체리듬을 한 7주쯤 겪었다. 도저히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 동네 병원에 내원했는데, 아주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동네 병원보다는 좀 큰 병원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이때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가 크게 아프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생리 주기는 스트레스가 많으면 으레 바뀌는 거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술은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을 남들보다 더 마시니까 몸에 나쁠 만한 다른 일은 하지 말자’ 주의라 술만 안 마시면 아주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병이란 것이 술만 안 마신다고 다 낫는 것도 아닌 데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 중 하나가 ‘몸 안 좋다고 하면서 병원 절대 안 가는 사람’인지라 잽싸게 2차 병원을 예약했다.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아주 쉽게 생각하고 2차 병원에 금방 내원했지만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 병원에서는 수술이 어려우니 더 상급 병원을 알아보라는 안내까지 있었다.
사실 나는 병명만 큼지막하지 내 몸 안에 있는 병마는 작으니까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려 했었다. 그런데 ‘큰 병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맞긴 맞는지, 2차 병원에서 나와서 3차 병원 진료 예약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하필 나에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차에 혼자 들어앉아서 한참 울다가 갑자기 ‘이번 결과로 평생 술을 못 마실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나도 나다. 죽을 수도 있겠다. 무섭다. 두렵다. 내 미래는 어떡하지…. 도 아닌 ‘앞으로 술 못 마실 수도 있겠다.’라니.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가장 큰 즐거움과 재미를 강제로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함축된 문장이 아니었을까. 혹은 생리불순이라는 사소한 불편이 생각지도 못했던 병명까지 붙어 수술까지 치달아가는 이 과정이 너무나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나는 차마 더 큰 걱정을 할 새도 없었는지 모른다. 1차 병원에서 3차 병원까지 가는 데 고작 한 달이었으므로.
한편 금주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고작 한 달이라기에는 사실상 술을 접한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술을 끊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할 일이 있어도 2주간 금주해 본 것이 최장 기록이었는데……. 술만 안 마시면 금방 좋아질 컨디션 난조 정도로 생각했는데, 당장 몇 주 뒤에 수술을 하게 되어버리는 바람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꼼짝없이 금주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1차 병원을 다녀오고부터 자체적으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있었는데 수술 전후는 물론이고, 피치 못할 상황으로 수술이 잘 안 되기라도 한다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입에 술을 대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주 아주 끔찍했다! 삼겹살, 곱창, 회에 소주를 못 마시는 삶이라니. 나는 아직 그런 삶을 원해본 적 없었다고!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건강해야 했다.
내 주변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먹고 금주해 본 적 있느냐고 물어보면 거의 백이면 백, 금주를 마음먹고 첫 일주일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나 역시도 가볍게 술을 참던 때와는 다르게 수술일이 잡히고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리니 나의 주특기인 청개구리 심보가 더욱 활개를 쳤다.
‘아니. 그동안 모를 때는 술 잘만 먹고도 살았는데. 이거 며칠 참는다고 뭐 더 좋아지겠어?’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랬는데. 차라리 내일 먹는 것보다 오늘 먹는 게 낫지 않겠어?’
‘소주 반 병으로는 취하지도 않는데, 내가 취하지 않는다는 건 내 뇌도 안 취한다는 거 아냐? 뇌가 취하지 않으면 장기도 영향 안 받는 거 아니야?’
근 한 달간은 술을 안 먹어서 뇌가 활성화됐던 건지 수술을 앞두고도 술을 먹어도 될 이유가 100개는 떠올랐다. 본격적인 금주자가 되고 첫 일주일, 그러니까 처음 동네 병원을 가고서 한 달이 딱 지나고 돌아오는 첫 주에 술 참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술을 마실 수가 없으니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가져다 놔도 흥이 안 났다. 그렇다고 큰 수술 앞두고 눈 딱 감고 술을 마실만큼 무모하지는 않은지라, 그때 처음으로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소주파라 맥주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것만이 동아줄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마저도 얼마나 감사하던지. 식품 공학이여 만세!
아무튼 그렇게 버티고 버틴 결과…… 나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좋은 수술 결과를 받았다. 추가로 더 다행인 건 수술 후 처음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 물어본 질문이었던 “술 마셔도 되나요?”에 “드셔도 돼요. 그런데 만취만 하지 마세요.”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긍정적 대답이었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다.)
사실 수술은 잘 끝났고 경과도 아주 좋지만 혹시나 재발할지 몰라 몇 년째 추적관찰을 꾸준히 하며 살고 있다. 가끔, 건강을 잃게 되면 맛있는 음식에 술 한잔을 곁들이는 즐거움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얼 먹어도 흥이 나지 않는 따분한 시간을 젊은 나이에 몸소 체험했던 것을 떠올린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의사 선생님의 말을 거역하고 가끔 만취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몰라도 술쟁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건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