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겠지만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마셔야만 친해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술을 마시면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가 생긴다고나 할까. 하여튼 어쩌다 보니 친한 친구 10명 중 9명 정도는 나와 같은 애주가들로 구성되어 버렸다. 결국 친구를 만나면 자연스레 술이 따라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주변인들 사이에서 I인척 하는 E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그것은 내 MBTI가 내향형(I)인데도 매주 술약속으로 바쁘기 때문이다. 술은 혼자서 먹을 때와 여럿이서 먹을 때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술 약속을 잡게 되는 거지, 내가 외향인이라서 매주 밖에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님에도 내 주변인들은 내가 I임을 전혀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변명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그렇지만 주변인들이 나를 외향인으로 바라보는 것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도 했다. 내가 봐도 내가 외향인인지 내향인인지 헷갈릴 때가 있으니까. 나는 매주 약속이 있다 못해, 다음 약속을 잡기 위해서는 캘린더를 켜서 최소 한 달 뒤의 달력을 보고 날을 잡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도리어 머쓱해지는 건 내쪽이었다. ‘내향인이라면서 약속이 이렇게 많은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향인은 이렇다, 외향인은 이렇다 편 가르기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술이라면 무조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탓에 내 내면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에너지를 과소비해 가며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번아웃이 왔을 때도 술 약속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내가 손해를 보면 봤지 남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 탓에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됐음에도 차마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하자는 말을 하지 못해서 결국 예정된 술약속에 나간 것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와 약속을 잡은 사람들은 최소한 한 달 동안 이 약속을 기다렸을 텐데, 내가 좀 힘들다고 해서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술을 자주 마시고, 오래 마셔온 사람들의 큰 착각 중 하나는 술을 마신 내 모습이 진짜 내 본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상황이나 때에 따른 다양한 모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나의 다양한 모습들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나의 디폴트값을 술을 마시는 나, 혹은 술을 이미 마신 나로 정해버리면? 누구든 그 본모습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애주가들은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내향인임에도 불구하고 고갈된 에너지를 내면의 휴식으로 채우는 대신, 밖에 나가서 알코올로 잠시 잊는 방향으로 택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는 점점 더 바닥을 쳤고, 그럼 또 술을 마셔서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렸고, 또다시 에너지는 떨어졌고, 그 공허감을 술로 채웠다. 말 그대로 번번번번…x∞의 연속이었고, 나는 결국 아웃. 나가떨어졌다.
이런 나에게 휴식보다도 선행되어야 했던 건 “예정된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었고, 그런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약속을 취소할 용기”였다. 술도 좋고, 같이 마셔주는 친구도 소중하고, 술자리도 즐거웠지만, 정작 나를 잃어버린 탓에 딱 그 술자리가 끝나면 나에게 무엇도 남지 않았다. 굳이 남은 것을 꼽아보자면 숙취, 후회, 차라리 격리라도 당해서 합법적으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 큰일이었다. 우울감에 의한 알코올의존증을 겪어본 탓에 이 상황을 조금 더 끌었다가는 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너 자신이잖아. 고작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한 달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을 파투 낸다고? 네가 뭘 했길래 힘들어? 너 솔직히 말해봐. 술 마셔서 힘든 거잖아. 네 인스타를 봐봐. 매일 놀고먹기만 하는 것 같은데 친구들한테 혼자 있고 싶다, 힘들다, 하면서 약속 취소한다고 하면 이해해 줄 것 같아? 네 생각만 하는 아주 이기적인 아이로 볼걸? 너한테 실망할 거야. 다신 너랑 약속 잡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런가 하면 나를 변호하고 싶기도 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약속 취소하자고 말하자. 지금 너 출퇴근하는 것도 벅차. 힘들다고 집안일도 내팽개치기 시작했잖아. 청소를 안 하기 시작하는 거, 우울증의 조짐이라는 거 알지? 너 겪어봤잖아. 아무도 네가 약속 취소한다고 나쁜 사람으로 생각 안 해. 취소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약속을 좀 미룬다고 생각하자.’
술약속 취소 여부에 있어서 머릿속 천사와 악마가 대립하는 것도 웃기는 일 같지만, 사실 이때 약속을 한두 개 취소해야 될 수준이 아니었다. 술자리도 술자리지만, 업무적인 스트레스도 있어서 번아웃의 굴레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니 최소 한 달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충전해야만 했다. 사적인 인간관계를 단절해서라도 너무 많은 감각들에 노출되지 않도록, 그렇게라도 나를 버닝 하는 시간을 업무시간만으로 한정하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한 달간의 약속, 최소 주 2회라고만 쳐도 8개의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심지어 모두 다른 친구들로 구성된 모임들이다. 안 믿기겠지만 나 내향형 맞다.)
고민하는 것이 길어지니 약속 일자가 성큼 다가오기만 해서 드디어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다! 대신 순전히 나의 컨디션만을 이유로 취소하는 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합리적인 변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 탑 2를 꼽으라면, 처음 코로나가 확산될 때 밀접 접촉자로만 분류되어도 2주간 격리해야 했던 때와 교통사고로 인해 입원을 했으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가족 간의 면회마저도 금지되었던 때였다. 중요한 포인트는 ‘합법적인’, ‘누구에게나 용인되는 혼자’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약속을 취소할만한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 내기로 했다.
병원에 갔는데 술을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키우는 고양이가 아파서, 갑자기 외부 출장을 오래 가게 되어서…… 허울이 좋아 ‘타당한 이유’이지, 사실상 거짓말이었다. 나에게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내가 힘들어서 뿐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나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내가 한 번의 약속을 취소한다고 해도 내 친구들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할 리도 없었다. 내 친구들은 속이 넓다. 그동안 내 술주정을 기꺼이 감내하고 또 만나서 술을 마셔주었으니까. 내 사람들은 나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달에 만나자고 하면 술과 잘 어울리는 다음 달의 제철 음식을 찾아내줄 것이다. 열심히 거짓말을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되려 점차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은 확신이 섰다. 그럼 이제 ‘약속을 취소할 용기’를 발휘할 때였다.
우리 이번에 만나기로 했던 거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 아니면 나 빼고 만나도 돼!
사실 요즘 번아웃이 왔는지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약속에 나갈 기운이 없어.
그래서 최대한 메신저랑도 멀어지려고 해.
연락 잘 안 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충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해 줘.
좀 충전되면 다시 만나자고 연락할게. 내 멋대로 갑자기 약속 취소해서 미안해.
통보에 가까운, 아니 일방적인 통보인 나의 약속 취소에도 혹여나 우려했던 싸늘한 반응은 없었다. 나에게 돌아온 것은 내 힘듦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과 안녕에 대한 기원뿐이었다. 내 용기에 긍정을 불어넣어 준 그들이 고마웠다. 나는 그들이 베푼 다정 덕에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시기 이후, 내가 나의 중심을 잃고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외부의 자극에 의해 한없이 타오르는 것을 경계하게 됐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핑계로 분별없이 술을 마시고 있지는 않나?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지는 않나? 나의 번(burn)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나?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몇 가지 문장이 마음에 새겨지곤 한다.
멈출 용기를 지닐 것, 멈출 때를 알 것, 그때 현명하게 멈출 것.